집 근처에 보행로가 따로 없는 골목들이 있다. 교회를 가거나 산책을 할 때 가끔 지나는 길인데 그 구간을 걸을 때는 늘 뒤에 차가 오는지 확인을 하며 걷는다. 양쪽에서 차들이 동시에 오기라도 하면 보행자가 잠시 몸을 비켜 차가 지나가길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보행자와 운전자는 불편한 관계다. 자동차를 의식하지 않고 편히 다닐 수 있는 골목길이 드물다. 보행자 중심이 아닌 길들이 너무 많다. 차 뿐 아니라 오토바이, 자전거, 퀵보드가 언제 어디서 튀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길을 걸을 땐 항상 주의를 살펴야 한다.
명동에서 쇼핑을 하던 중 수많은 인파를 뚫고 명동 거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차를 보며 저 운전자는 제정신일까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골목길 양쪽에 일렬로 차가 주차되어 있고 인도도 없는 좁은 길을 조심조심 걸어가다 차 한 대가 옷깃을 스치며 아슬아슬하게 지나갔을 때는 세상의 모든 차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꼬리 물기를 하다 신호에 걸려 횡단보도 중앙에 딱 버티고 있는 자동차를 비켜 건너며 운전자의 조급함에 화가 나기도 했다. 신호등 앞에서 파란 불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슬금슬금 횡단보도 쪽으로 다가오는 우회전 자동차를 미워했고, 비오는 날 물이 고인 웅덩이를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지나쳐 종아리에 물을 튀기며 지나가는 차 뒤통수를 매섭게 노려보기도 했다.
보행자로 살았던 39년 동안 자동차에 호감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급작스럽게 운전대를 잡고 나니 운전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좁은 골목에서 사람들이 차를 피해 비키는 모습을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가끔은 비켜주는 속도가 너무 느린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분명 뒤에서 차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고 느긋하게 제 갈 길 가는 보행자 뒤를 졸졸 따라갈 때면 경적을 울리고 싶어진다. 차량이 많은 도로에서 운전하다 보면 뒤차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꼬리 물기를 해야 되는 상황도 벌어진다. 우회전을 하다 파란불이 걸려 기다리던 중 파란불이 몇 초 남지도 않았는데 저 멀리에서 뛰어오는 보행자를 발견하면 먼저 지나갈까 말까 고민에 빠진다. 소낙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운전해 보니 물웅덩이를 미처 발견 못할 때도 있더라. 다행히 아직까지는 아무에게도 물을 튀기지 않았지만 언젠가 보행자의 저주를 받아 내 뒤통수가 따끔해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2021년 4월 17일부터 전국 일반도로의 제한 속도는 시속 50km, 주택가 등 이면도로(폭 9미터 미만 도로)는 시속 30km로 하향 조정되었다. ‘안전속도 5030’ 타이틀로 보행자 중심의 교통 문화를 만들겠다는 취지이다. 처음 이 소식을 듣자마자 ‘뭐야. 그럼 시내에서는 기어가라는 거야?’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차를 몰기 시작한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보행자 중심이 아닌 운전자 중심으로 생각이 변해버린 것이다. 인간의 적응력은 이토록 놀랍다.
세상은 이미 자동차로 가득하고 점점 더 많은 자동차가 도로를 채울 것이다. 기계의 편리함이 인간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건 순식간이다. 2010년 서울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지하철 역 입구에 수많은 무료 신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인기의 절정을 누린 ‘지하철 신문’은 내용이 간결하고 가십 위주의 뉴스가 많아 출퇴근길에 부담 없이 읽기 좋았다. 메트로, 포커스, 데일리 같은 신문을 펼쳐 읽던 직장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하철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신문을 든 아름다운 풍경을 지켜볼 수 있던 때는 그 무렵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 스마트폰이 책과 신문을 삼켜버렸다.
예전에는 한 가정에 차 한 대면 충분했지만 이제는 ‘세컨드 카’ ‘마트용 차’ 라는 단어가 흔히 사용된다. 우리 아파트만 봐도 차를 한 대 이상 가진 가정이 꽤 있다. 보통 아파트마다 주차장이 한정되어 있어 가정에서 차량 한 대를 더 소유할 경우 매달 일정한 금액을 추가로 내야 한다. 추가 금액은 아파트 공동 수익으로 계산되기에 매달 발행되는 관리비 내역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사는 204동은 22층 건물에 88가구가 등록되어 있다. 아파트가 제공하는 총 주차대수는 세대 당 1.07대이다. 한 집에 차가 한 대만 있다면 주차장은 늘 여유로울 것이다. 하지만 내역서를 살펴보니 31대의 차량이 추가로 등록되어 있다. 세 가구 중 한 가구는 차 두 대를 갖고 있는 셈이다.
자율 주행 시대가 오면 공유 차량이 늘어나고 개인 차량이 줄어들 거라고 예측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인간 대신 AI가 운전을 하게 되면 더 많은 사람이 자신만의 자동차를 가지고 싶어 하지 않을까? 자동차 안에서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화상 회의를 하고 잠을 자며 자동차와 더더욱 한 몸이 되어 가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보행자가 걸을 수 있는 인도는 또 얼마나 축소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