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 않은 것을 불친절로 생각하시나요?
내 차라면 어쩌다 흠집을 내고 속은 쓰리더라도 '별일 아니야'라며 대범한 척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의 것에는 규칙이 있고 허용되는 범위가 달라진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실수가 두려운 것이다. 아무리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적응 없이는 그것을 제대로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렌터카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
특히 소규모 어린이집에서 지내다가 규모와 시스템이 전혀 다른 공립단설유치원으로 옮기는 경우, 아이들은 적응하는데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이 전환기를 겪으면서 새로운 전자제품을 조립할 때처럼 딸각거리는 이질감과 곤란함을 느낀다. 마치 내가 낯선 렌터카의 버튼들과 씨름하듯, 새로운 환경의 낯선 규칙들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적응 과정은 마치 감기처럼 저마다 다르다.
새 학년을 준비하는 유치원에서 가장 공들이는 것은 3세 유아의 적응이다. 2월 말이 되면 대부분의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설렘과 기대를 가질 수 있도록 오리엔테이션을 준비한다. 아이들은 아직 무엇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 채 엄마 손을 잡고 오지만, 단설유치원의 넓은 공간과 특별실을 보며 금세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인다. 유치원이 준비한 재미있는 공연을 보고, 신나는 몸놀이를 하다 보면 어느새 '다음에 또 오고 싶어요'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교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발견하는 순간은 마치 운명 같은 만남이 되기도 한다. 간혹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는 아이들도 있다. 물론 조심스러운 성향의 아이들이나 익숙한 옛 기관이 더 그리운 아이들은 망설임 가득한 눈빛을 보이기도 한다.
호기심 반짝이던 눈동자로 유치원 이곳저곳을 훑어보던 아이도 3월 입학식 날, 엄마와 헤어질 시간이 되면 눈물 콧물 다 흘리고 눈물바다를 만든다. 아이들의 적응 과정은 마치 감기처럼 저마다 다르다. 어떤 아이는 하룻밤 사이 털고 일어나듯 금세 적응하지만, 어떤 아이는 오랫동안 앓아야 한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더욱 아프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기를 바라는 마음에 2월이면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온다.
"저희 아이가 oo어린이집에서 왔는데요, 워낙 소심하고 사교성이 없어서 걱정이에요. 같은 어린이집 친구가 있다고 하니 같은 반이 될 수는 없을까요?" 평소엔 멀쩡하던 아이가 전화 속에서는 마치 소심한 아이처럼 묘사된다. "우리 아이가 수줍음이 많아서 먼저 다가가지 못해요", "친한 친구와 꼭 같은 반이 되었으면 해요" 등 비슷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때로는 "그 아이와는 다른 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라며 특정 유아를 지목하기도 하고, "엄마들끼리 어색해서..."라며 조심스럽게 개인사를 꺼내기도 한다.
표현은 제각각이지만, 이 모든 말에는 '우리 아이가 잘 지낼 수 있도록 엄마가 할 수 있는 한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있다. 이러한 개별적인 요청들을 모두 수용하기란 어렵다. 유치원에는 나름의 학급 편성 원칙이 있어서 남녀 비율, 생년월일 분포, 방과후과정 참여 유아 수 등의 요소들을 고려하여 학급별로 동질한 특성을 갖추도록 한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원하는 학급에 특정 유아들을 배정할 수 없다.
학급 편성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만남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신중한 과정이다. 2월 말이 되면 학급별로 균형 잡힌 '가, 나, 다'와 같은 형태로 학급을 구성하고, 각 반 명단을 봉투에 밀봉하여 교사들이 일 년간 지도할 학급을 뽑는다. 이때 교사들은 가급적 전년도 맡았던 유아와 다시 만나지 않는 방향으로 조정한다. 익숙한 교사와 지내면 아이의 적응이 수월할 수 있지만, 새로운 교사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이에게 또 다른 경험세계가 열리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림책에 관심을 많이 가진 교사는 아무래도 아이에게 그림책을 매체로 활동을 할 가능성이 높고, 신체활동에 관심이 많은 교사는 움직임에 관심이 많고 동적인 성향의 유아에 대해 좀 더 너그러울 가능성이 있다. 다양한 교사를 만날 때마다 아이의 경험세계로 다양하게 열린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만 한두 학급의 작은 병설유치원은 교사가 아이들을 오래 관찰하며 각자의 강점을 살리는 연속성 있는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한다.
이런 변화 앞에서 부모들은 유독 아이의 적응을 걱정스러워한다. 흥미로운 점은 자신이 낯선 영역에 도전하여 이룬 성과는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수성가(自手成家)'라는 말을 쓰면서도, 아이에게는 그런 도전이 아직 이르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적응의 경험이 적은 아이들이 모인 공간에서도 유독 자기 아이만 더디게 적응할까, 새로운 환경이 아이에게 불친절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이러한 걱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아이의 성장 가능성을 제한할 만큼 지나치기도 하다.
2025년, AI가 몰고 온 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매일 새로운 적응을 요구받고 있다. 은행 업무만 보더라도 창구에서 돈을 찾고 예금하던 시절을 지나 폰뱅킹, 인터넷뱅킹이 등장했고, 이제는 계좌번호 없이도 이름과 전화번호만으로 송금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키오스크 주문도 일상이 되었다. 키오스크 도입이 일자리 감소라는 우려를 낳기도 하지만, 직원들이 단순 주문 접수보다 음식 조리와 서비스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모든 사람이 같은 속도로 적응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기술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거나, 반복된 학습으로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는 믿음이 부족한 이들은 변화를 피하고 익숙한 방식만을 고수하려 한다. 나는 유아들의 적응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환경은 누구에게나 어색하고 낯설다.
새로운 환경은 누구에게나 어색하고 낯설다. 3월의 쌀쌀한 아침바람을 맞으며 졸린 눈을 비비고 집을 나서야 하는 일은 어른에게도, 아이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유독 아이들에게만 '유치원은 놀이하는 곳이니 당연히 즐겁고 활기차게 등원해야 한다'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
유치원에서는 보통 3월 한 달을 적응기간으로 둔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간다. 어떤 아이는 금세 적응하는가 하면,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아이도 있다. 각자의 적응 속도가 다른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해 가는 과정 자체가 이 시기의 중요한 배움이 된다.
이전과 비슷한 환경을 제공하거나 친한 친구를 통해 적응을 돕고자 하는 시도는 오히려 새로운 시작의 기회를 막을 수 있다. 익숙한 친구와 함께라면 그 친구와의 관계나 놀이 패턴이 반복되기 쉽다. 실제로 같은 친구와의 반 배정을 요청하는 부모의 자녀의 경우, 대부분 스스로 놀이를 이끌기보다 그 친구가 자신을 놀이에 끼워주기만을 바라는 경향이 있다. '우리'라는 특별한 관계 아래 다른 친구들의 놀이 참여를 거부하는 상황도 생긴다. 오히려 아이들이 새로운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놀이에 적극적으로 제안도 하면서 더 넓은 '우리'를 경험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교사의 섬세한 관찰과 지원, 숙고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다.
적응할 수 있도록 너무 많은 징검다리를 놓아준다면,
아이는 세상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띄엄띄엄 건너가기만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경험해 보았다. 낯선 장소에 가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리저리 살피느라 긴장하고 피로해진다는 것을. 반면 친밀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오히려 그 사람의 그늘에 머물며 나의 활동 범위가 좁아지고, 이미 규정된 나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
새로운 환경 앞에서 아이들이 느끼는 어색함과 불안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오히려 이 감정들이 새로운 시도와 도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도, 사실은 관계에 대한 탐색이자 호기심의 표현일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의 이러한 모습을 기다려주고 지켜봐 줄 필요가 있다.
아이들의 힘을 믿어보자. 부모가 너무 애쓰지 않아도,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만의 경험을 만들어갈 내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적응을 돕겠다고 너무 많은 징검다리를 놓아준다면, 아이는 세상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띄엄띄엄 건너가기만 할지도 모른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 불친절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