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나'를 바라는 것은 탐욕일까?
1월 중순,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영화관을 찾았고, 우연히 '서브스턴스'를 보게 되었다. 관객은 대여섯 명의 여성뿐이었다. 나는 데미 무어를 사랑과 영혼의 주연 배우로 기억하지만, 극장 안의 관객들은 그 영화를 기억할 만한 세대가 아니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선택했고, 그 덕분인지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았다.
'더 나은 나'를 바라는 것이 잘못인가요?
이 영화는 강렬했다. 나이 든 TV 스타를 연기하는 데미 무어(엘리자베스 역)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벗은 몸을 드러내는 장면도 놀라웠지만, 마거릿 퀄리(수 역)의 생기 넘치는 미소와 에너지는 '더 나은 나'의 상징처럼 보였다. 나는 '더 나은 나'라는 개념이 영화에서 어떻게 구현될지 궁금했다. 마치 숲 속 연못에 도끼를 빠뜨린 나무꾼이 산신령에게 금도끼와 은도끼를 받듯, 엘리자베스에게 필요한 것은 젊음의 기운을 조금 되찾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는 과정은 아름답거나 경이로운 것이 아니었다. 등줄기가 갈라지고, 피가 낭자하는 순간 그것은 오히려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장면에 가까웠다.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는 과정은 아름답거나 경이로운 것이 아니었다.
영화는 단순히 노화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더 나은 나'가 되는 것이 개인의 선택인지, 사회적 압박의 결과인지 묻는다. 엘리자베스가 처음부터 변화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50이 넘으면 여자가 아니다"라는 제작자의 말을 우연히 듣고 위축되었고, 거리의 대형 광고판에서 자신의 모습이 내려가는 걸 보며 충격을 받았다.
방송국 동료들이 퇴장을 암시하는 인사를 건네고, "그동안 수고했다"는 케이크를 받았을 때, 그녀는 '더 나은 나'가 되는 것만이 생존하는 길이라 믿게 된다.
그녀가 선택한 세계는 냉혹했다. 이름을 잃고, 번호 503으로 불리며, 허름한 건물에서 '서브스탠스'를 건네받는다. 7일마다 활성제를 주입하면서, 엘리자베스는 점점 사라지고, 새로운 '수'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한다. 수는 무대 위에서 찬란한 나비처럼 날아오르지만, 엘리자베스는 생존을 위해 음식물을 몸에 주입한 채, 의식 없이 화장실 바닥에 누워 있어야 한다. 방송국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엘리자베스가 아닌 수가 되었고, 그녀의 자리는 너무도 빠르게 대체된다.
기억하라. 둘은 하나다.
하지만 7일이 지나면 역할은 다시 바뀌어야 한다. 욕망에 사로잡힌 수는 약속된 균형을 무시하고 더 오래 살아남고자 한다. 그녀는 코피를 흘리고, 몸에 이상 증세가 나타나자 엘리자베스의 체액을 빼앗는다. 엘리자베스는 점점 쇠약해지고, 마침내 골룸처럼 굽고 척추가 내려앉은 채 바짝 마른 존재로 변해간다. 단순히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 혹은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대가일까?
'더 나은 나'가 당신의 아이라면, 당신은 사라질 건가요?
나는 이 영화가 외모와 젊음에 대한 사회적 강박을 비판하는 작품이라는 해석에 동의하지만, 한 가지 다른 관점도 떠올랐다.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는 단순한 원본과 클론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관계처럼 보였다.
나이가 들고, 사회적 인정에서 밀려나는 부모 세대(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자녀(수)에게 쏟아붓는다. 마치 현실에서도 "내가 잘되는 것보다, 자식이 잘되는 것이 곧 나의 성공"이라 믿는 부모들의 심리와 같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부담스러워한다. 부모의 희생을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과 무관한 것이라 여기며 독립하려 한다.
영화 속 엘리자베스는 7일마다 깨어나,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수를 바라보며 질투와 분노를 느낀다. 그녀가 흠모하는 것은 수의 팽팽한 피부, 사랑스러운 입술, 사라지지 않는 웃음이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동창이 건넨 연락처를 물에 젖을까 봐 다급히 주워드는 그녀의 모습은,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거울 앞에 선 순간, 자신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찾지 못한 엘리자베스는 분노에 휩싸여 화장을 지운다. 자기 부정과 실망, 절망이 뒤섞인 이 장면은 데미 무어가 15번 이상 다시 촬영할 정도로 감정적으로 어려웠다고 한다.
영화 속 수는 엘리자베스의 존재를 지우려 한다. 화장실 바닥에 축 늘어진 엘리자베스를 혐오하며 그녀의 흔적을 없애려 한다. 부모 세대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지만, 자녀는 부모의 희생을 부담으로 여긴다. 자녀는 부모 세대가 물러나길 원하지만, 부모는 완전히 손을 놓을 수 없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살아가지만, 결국 자녀의 삶에서 자신이 사라질 때,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엘리자베스는 '더 나은 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대체할 존재를 키워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수는 더 이상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더 나은 나'란 무엇일까? 희생을 통해 만들어지는 존재인가, 아니면 나를 지우면서까지 이루어야 할 목표인가? 우리는 정말 '더 나은 나'를 원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사회와 타인의 기대 속에서 만들어진 허상일 뿐인가? '더 나은 나'라는 것은 과연 누구에게 낫단 말인가?
마지막 순간, 엘리자베스는 수를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팬들이 보낸 붉은 장미 바구니를 보고 망설인다. 탐욕스럽고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장미들 앞에서 그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수가 사라지면 그녀를 향한 인정도 사라지고, 결국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엘리자베스인지, 수인지, 혹은 자신이 만들어낸 '더 나은 나'인지 혼란스러워한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수를 다시 살려낸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녀의 비극적 결말을 불러온다. '더 나은 나'를 바랐던 소망이 탐욕처럼 영화에서 그려진 것 같아 안타까울 지경이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금도끼도 은도끼도 얻지 못했다.
모조, 오늘도 나에게 말을 건넨다
'서브스탠스'는 단순히 젊음에 대한 TV 스타의 집착을 다룬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세대 간 희생과 상실, 독립과 단절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균형을 유지해야 할까?
'더 나은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더 젊고, 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온전히 '나'라는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나란 사람을 이해하는 것. 사랑스러운 부분도 있고, 나약한 점도 있지만 애쓰며 살아가는 나를 인정하는 것. 매 순간 좌절하지만 오늘의 기회를 맞이할 용기를 내는 것. 나 또한 자꾸 넘어지고 멈추려는 나를 다독이며 다시 일어서려 한다.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저자는 책 엄마를 위한 멘탈수업에서 '모조 점수표'를 통해 엄마들이 자신의 하루를 점검하고, 단순히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채우는 요소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제안한다. 우리가 매일 하는 일들의 가치를 매기고,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과정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것과도 같다. 혹시 지금 열심히 살아가고, 자기계발에 몰두하고 있지만, 그것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일인지, 아니면 단순히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채우고 있는 시간들이 단순히 결점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색깔을 더욱 빛나게 하는 과정이 되기를. 모조를 통해 나를 빛나게 하는 것, 그것이 결국 '더 나은 나'를 찾는 길이 아닐까.
*모조: 내면에서 우러나와 외부로 드러나는 바로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 (출처: 모조 P.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