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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생 딥스를 2025년에 소환하여

당신도 길을 잃었을지 모르지만 찾게 될 거야

by flyingoreal

'딥스'는 유아교육계의 '필독서'라는 무거운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솔직히 그 "꼭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멀어졌었다. 대학 시절에 제대로 읽었는지, 그저 대충 훑어봤는지 기억마저 희미해졌으니까 말이다.

얼마 전 작은 온라인 북클럽을 만들었다. 함께 읽을 책으로 <딥스>를 골랐다. 정말 궁금했다. 내 대학 시절부터 지금 2025년까지, 이 책이 여전히 베스트셀러라니. 도대체 무슨 마법이 담겨 있는 걸까?

『딥스』는 다양한 모습으로 꾸준히 읽히고 있다.

저자 버지니아 엑슬린이 이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은 건 1964년이다. 정민사를 거쳐 여러 출판사들의 손을 타고, 다양한 표정의 표지들을 입으며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문학작품도 아닌 책이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람들의 책장에 자리한다는 건, 우리가 아직 풀지 못한 교육의 숙제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어떤 책을 읽을 땐 마음이 아프고, 어떤 책은 눈물이 나고, 또 어떤 책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딥스>는 특별했다. 여러 번 눈물이 맺혀 휴지를 꺼내야 했으니까.



딥스, 그 아이


람들은 흔히 딥스를 '상처 입은 아이가 놀이치료로 자아를 회복하는 이야기'로 요약해 버린다.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수 있을까?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면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가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을.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모두는 작은 가슴에 분노와 실망, 무서움, 두려움을 품었던 딥스를 어린 시절의 어느 골목에 남겨두고 왔다. 그렇게 성장했고, 이 책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영화 '서브스턴스'의 또 다른 버전이다.


딥스는 우리에게 상징입니다.
우리가 온 힘을 다해서 지키려고 노력하는
인간적 가치의 상징 말입니다. (p.331.)



놀이치료로 유명한 엑슬린 교수는 한 유치원에서 골치 아픈 아이를 소개받는다. 2년간 지켜봤지만, 선생님들은 물론 부모도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변화를 기대하기보다는 "그저 시간이 필요해요"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딥스는 관심을 보이는 교사들에게 방어적이고 때로는 적대적이었다. 친구들을 할퀴거나 때리기도 해서 다른 학부모들의 민원까지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이 다섯 살 아이는 유치원에 들어와서도 옷을 벗지 않고 그저 멍하니 서 있곤 했다. 누군가 관심을 보이면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갔다. 결국 유치원은 상담을 의뢰했다.

엑슬린 교수는 놀이치료실에서 정기적으로 딥스를 만났다. 그저 기다렸다. 아이가 스스로를 드러내고,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때까지 말이다. 똑같은 사물과 놀잇감이라도 아이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 여정이 순탄했을 리 없다. 딥스의 어머니는 놀이치료에 대한 기대보다 불신과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딥스에 관한 자세한 내력은 유치원을 통해 알아보세요. 저희에겐 더 보탬이 될 만한 것이 없어요... 딥스에 대해 더 이야기해 드릴 것이 없다는 것, 참 비극이지요." 엄마는 딥스가 지적 장애가 있다고 확신하며 아이의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딥스는 특이한 방식으로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자신을 타인처럼 '너'라고 말하거나 제 이름으로 지칭했다. 유치원에서도 이런 아이를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 당연히 교사들은 당황스럽고 혼란스럽다. 다음은 엑슬린 교수와 딥스의 첫 만남에서 오간 대화의 일부다.


교수: 딥스야, 네 모자와 외투를 벗고 싶지 않니?
딥스: 그래요. 네 외투와 모자를 벗어라. 딥스야! 넌 모자를 벗어야 해. 외투를 벗어야 해. 딥스!
(딥스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교수: 외투와 모자를 벗고 싶다는 말이지? 좋아. 딥스야. 어서 벗으렴.
딥스: 장갑도 벗고 신발도 벗어라.
교수: 그래, 네가 원한다면 장갑과 신발도 벗으렴.
딥스: 그래요.
(딥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소매에서 팔을 빼려고 어색하게 부스럭거렸다.
그러더니 훌쩍거리며 교수 앞으로 다가간다.)
딥스는 우두커니 한쪽에 서서 선생님과 아이들을 바라본다. ⓒ Freepik


자신의 삶을 주도한다는 건


놀랍게도 엑슬린 교수는 딥스를 이끌려하지 않았다. 단지 딥스의 행동에 맞춰 대화할 뿐이었다. 딥스가 그 공간에서 주도권을 갖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스스로 조절해가길 기다렸다. 특히 주목할 점은, 교수가 '기대하는 행동'을 하도록 칭찬을 퍼붓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즘은 칭찬을 최고의 교육법으로 여기지만, 엑슬린 교수는 다르게 생각했다.

'어쩜 그리 잘하느냐며 요란스럽게 칭찬하진 않을 것이다. 딥스는 분명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사람은 누구나 주도권이 자신에게 주어지면 최고로 자신 있는 일부터 한다. 칭찬이나 경탄 등은 자신이 나갈 방향을 결정할 때 참고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더 중요한 부분을 탐사해보려는 노력을 아예 차단하게 될 수 있다.'

엑슬린 교수는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과 어른의 기대에 따라 칭찬받는 일을 명확히 구분했다. 그녀의 관심은 '어떻게 온전히 자신일 수 있는가'에 있었다. '아이는 어리니까 엄마인 내가, 선생님인 내가 대신 결정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전문적인 지식으로 상대의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전문가 행세를 하며 모든 해답을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진실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엑슬린 교수는 글을 잘 읽고 쓰며, 사전을 즐겨 보고 계산도 잘하는 딥스가 왜 타인과 관계 맺는 데 어려움을 겪고 진짜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하는지 이해하고자 했다. 흔히 '이해'를 상대방에게 무조건 맞춰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엑슬린 교수의 방식은 달랐다. 그녀는 아이의 욕구를 존중하되, 놀이방에서 더 놀고 싶어 하는 딥스에게는 "이제 나갈 시간"이라는 분명한 한계를 제시했다.

많은 교사들은 이 같은 분명한 태도를 보이기 어려워한다. 아이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내일 또 놀자"라고 하거나, 부모처럼 "나가면 더 재미있는 걸 할 수 있어"라고 달래곤 한다. 특히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아이에게는 더 조심스러워지고, 결국 아이를 노골적으로 달래는 방식으로 흐른다.

그러나 엑슬린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의 이 한 시간은 딥스가 살아가는 시간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관계나 경험보다 우선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 일주일 동안 딥스가 보내는 다른 시간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중량) 만일 치료가 한 사람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통제한다면, 그 치료의 효과는 거의 없는 것과 같다. 나는 딥스가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점차 키워가면서 자신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심리적으로 독립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진짜 그 아이, 딥스


딥스는 치료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며 때로는 아기 같았고 때로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의 감정을 서서히 드러냈다. 모든 것이 허용되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자 비로소 진짜 자신을 보여주었다.


가까우면서도 일을 방해하지 않는 곳에 서서
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돼요.

놀이방 보일러가 고장났다는 얘기를 듣고 딥스가 한 말이다. 그렇게 하면 재미있는 걸 많이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다섯 살 아이가 알고 있다는 게 놀랍다. 아이들의 진짜 모습을 어른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건, 어쩌면 처음부터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주도권을 가졌다고 느낀 어느 날, 딥스는 놀이방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은 기쁨이에요. 난 이 기쁨으로 이 방에 들어와요.


딥스는 놀이치료 과정에서 냉정한 아빠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방에 가두거나, 작은 실수에도 크게 야단쳤던 기억, 그리고 자신과 눈을 맞추지 않고 피하는 엄마에게 느끼는 외로움까지 솔직히 표현했다. 또한 항상 '완벽한 아이'라고 칭찬받는 여동생에 대한 미움과 질투도 감추지 않았다. 엑슬린 교수는 "엄마는 너를 사랑하니까 그런 거야"라며 감정을 포장하거나, "그런 놀이는 안 돼"라고 아이의 솔직한 표현을 막아서지 않았다. 딥스에게는 자신의 상처와 감정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이에게 어떤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 Freepik


외롭고 불행했던, 그들의 편향과 착각


시간이 지나면서 딥스가 달라지자, 폐쇄적이던 어머니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의사였기에 생물학적, 의학적으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자신의 일까지 포기해야 했던 좌절감을 안고 있었다.

지적으로 뛰어났던 딥스의 부모는 상담을 받았을 때, "부모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 오히려 문제를 숨기려 했다. 딥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방에 가두기도 했다. 한번은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딥스는 지금 바보처럼 말하지 않았어요. 분명히 당신을 미워한다고 했어요." 그 순간 딥스의 아빠는 흐느껴 울었다.

부모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 Freepik

이들을 쉽게 비난하기 전에, 그들도 초보 부모였고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몰랐던 사람들이란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전문가로서는 성공했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외롭고 불행했던 사람들이었다.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때, 부모는 '도통 뭘 아는지 알 수 없어', '저 아이는 이상한 아이야', '나로서는 어쩔 수 없어'라고 아이를 쉽게 판단하고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오류에 빠지곤 한다.

심리학자 대니얼 커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편향과 착각으로 가득한지 설명한다. 부모 역시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오류와 편견이 숨어 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부모를 그대로 닮았거나, 마치 백지 상태여서 부모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딥스의 부모도 이와 같았다. 그들은 아이의 행동 결과만 보고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쉽게 판단하는 '사후편향'과 한 가지 특성을 과장해 아이 전체를 판단하는 '후광효과'에 빠져 있었다. 결국 자신들이 보고 싶은 모습만 보고, 아이를 진짜 자신의 모습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놀이치료상황에서 이런 모습은 분명히 드러난다. 작은 사건을 통해서도 딥스가 얼마나 스스로를 비난하는 법을 배웠는지, 왜 자신을 '나'가 아니라 '딥스'라 부르게 되었는지, 어떻게 자신을 잃어버렸는지 엿볼 수 있다.


(딥스가 토스트를 집으려고 팔을 뻗다가 컵 하나를 쓰러뜨렸다. 그러자 용수철처럼 일어서며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딥스: 파티는 더 이상 할 수 없어. 파티는 끝났어. 내가 차를 엎질렀어.
교수: 네가 차를 엎질러서 파티가 끝났니?
딥스: 바보! 바보! 바보!
교수: 그건 단지 실수였는데 뭐.
딥스: 바보니까 실수를 하지요.
(딥스가 소리쳤다. 아이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딥스: 파티는 끝났어요. 아이들도 다 갔어요. 파티는 이제 끝났어요.
(딥스는 흐느낌으로 목이 메었다. 목이 메었다.)

-중략-

교수: 미안해? 뭐가 미안해?
딥스: 차를 엎질러서요. 좀 더 조심해야 했는데. 내가 조심하지 않았어요.
교수: 넌 네가 좀 더 조심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딥스: 네. 좀 더 조심했어야죠. 그렇지만 바보는 아이에요.
교수: 조금 부주의하긴 했지만, 바보는 아니지.
딥스: 그래요.
(딥스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마음속 폭풍우를 잘 이겨낸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이겨낼 힘을 발견할 것이다.)



미완성의 부모, 용기 있는 사람들


영유아 영어 사교육 열풍으로 '4세 고시'가 사회적 이슈가 된 어느 날, 나는 1964년에 발간된 『딥스』를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 육아의 그늘진 부분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부모는 사랑을 바탕으로 자신의 육아 방식을 옳다고 믿지만, 사실 그 확신 뒤에는 수많은 착각과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면 아이도 반드시 그만큼 반응해야 한다"는 기대,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 역시 오류다.

부모는 '내가 보고 있는 아이'와 '진짜 아이의 모습'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고, 자기 안에 숨겨진 편향과 인식의 오류를 먼저 발견해야 한다. 결국 진정한 육아란 아이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부모가 먼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변화하는 과정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불완전하고 부족한 자신을 알면서도 아이와 함께 삶을 나누기로 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랑을 말로 가르치면 아이는 말로 배우고, 당신이 사랑을 가슴으로 보여주면 아이는 가슴으로 배운다. 미완성의 부모가 미완성의 아이를 키우고, 미완성의 아이가 어른이 된다. 부모는 스스로의 오류를 인정하고 이를 채워나가야 하며, 때로는 아이로부터 배우기도 해야 한다.

"가까우면서도 방해하지 않는 곳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돼요." 당신 또한 그럴 것이다. 지금 길을 잃었다고 느낄지 몰라도, 결국 당신도 그 길을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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