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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로부터 위로받고 싶은 밤

당신의 오늘은 138억 년을 건너왔다

by flyingoreal


오래전 몽골에 갔을 때의 일이다. 거칠고 투박한 게르에서 잠을 청했지만, 게르 밖 하늘만큼은 눈부신 별들로 가득했다. 도시의 반짝이는 가로등과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이 만들어낸 야경을 아름답다고 여기던 나는, 몽골의 초원에서 비로소 진짜 별빛과 마주하게 되었다. 수없이 많은 별들이 하늘에서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고, 나는 그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내가 우주 속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별들은 내 삶과 무관하게 그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fd8a396a-4b6c-48de-9c0a-0249936597fe.png 별을 세다가 포기했던 몽골의 밤을 추억하며 ⓒ 챗GPT

그러나 도시의 일상으로 돌아온 뒤, 그날 밤의 하늘은 금세 잊혔다.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고민이 생겨도 하늘이 아닌 땅만 바라보았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터벅터벅 걷다가 발끝에 걸린 작은 돌멩이를 툭 차며 하루의 고단함을 달랬다. 그렇게 하늘은 점점 내 삶에서 멀어져만 갔다.





최근 구독 중이던 EBS e클래스에서 ‘EBS XR 우주 대기획 10부작 <더 홈>’을 보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2021년에 방영된 것으로, 확장현실(XR) 스튜디오를 활용해 일반 대중이 우주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몰입할 수 있도록 기획된 시리즈다. 평소 우주에 관심이 많다는 배우 이지아 씨가 진행을 맡았다. 방영 당시 꽤 주목받았지만,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사실 우주라는 주제는 나에게 너무 막연했고, 특별히 궁금한 것도 없었기에 그 당시엔 눈길이 가지 않았던 것 같다. 빅뱅, 블랙홀, 중력과 같은 용어들은 그저 학교에서 억지로 암기했던 지식에 불과했다. 화면 속에서 배우 이지아 씨는 과연 우주에서 무엇을 보았던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오래전 몽골의 밤하늘에서 마주했던 무수한 별들이 다시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빅뱅 이후 입자의 탄생 ⓒ 챗GPT

1편에서는 우주의 시작, 즉 ‘빅뱅’의 역사를 다루었다. 빅뱅 이전의 우주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어느 순간 아주 작은 하나의 점이 나타났고, 이 점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폭발하며 최초의 입자들이 탄생하게 된다. 이때 태어난 기본 입자들이 바로 쿼크와 렙톤이다. 이들은 각자의 반입자를 만나면 사라진다.

쿼크와 렙톤은 같은 입자 가족이지만 성격이 다르다. 쿼크는 여러 개가 서로 강하게 뭉쳐 원자핵과 같은 중심을 이루고, 렙톤은 뭉치지 않고 홀로 주변을 돈다. 쿼크가 늘 여러 친구와 어울리는 ‘인싸’라면, 렙톤은 혼자 있는 게 편한 ‘아싸’ 같은 존재다. 성격과 생활방식은 다르지만, 이 둘 모두 우주를 이루는 필수적인 존재라는 점은 같다.

이 입자들에게는 각자 자신과 정반대 성질을 가진 반입자가 있다. 쿼크는 반쿼크를 만나고, 전자는 양전자와 만나면 풍선껌이 터지듯이 '팟'하고 서로 소멸하며 에너지로 바뀐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우연히도 아주 작은 확률로 일부 입자들이 살아남는다는 점이다. 그 소수의 입자들이 지금의 우주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을 과학자들은 ‘바리온 비대칭’이라고 부른다. 조금 쉽게 말하면, 우연히 살아남은 극소수의 쿼크들이 뭉쳐 양성자와 중성자를 만들었고, 이들이 원자핵을 이루게 된 것이다.



우주 최초의 빛이 생기는 순간 ⓒ 챗GPT

그러나 아직 이 시기의 우주는 빛이 없었다. 양성자와 중성자가 뭉쳐 더 큰 입자를 이루고, 이것이 수소와 헬륨이라는 최초의 원자핵을 형성했다. 빅뱅 이후 입자들이 처음 생겨난 지 약 38만 년이 지나서야 우주는 비로소 빛을 얻었다. 초기 우주는 너무 뜨거워 전자들이 원자핵과 결합하지 못했는데, 온도가 점점 낮아지자 드디어 전자와 원자핵이 결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최초의 빛이 우주 전체로 퍼지게 된다. 이것을 과학자들은 ‘우주 배경 복사(Cosmic Microwave Background)’라고 부른다. 어려운 용어이지만 쉽게 설명하면, 우주가 처음 빛을 얻었던 순간의 빛이 지금까지도 배경처럼 우주 전체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는 뜻이다.

더홈.jpg EBS XR 우주 대기획 '더 홈' 출처 : EBS CLASS-e


빅뱅 이후 약 95억 년이 지나 우리가 사는 태양이 탄생했고, 다시 그로부터 약 1억 년 뒤 지구가 태어났다. 이 모든 일이 우주에서 아주 작은 점 하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프로그램 진행자인 배우 이지아 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가 별의 후손이며, 빅뱅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잊지 마세요. 이 모든 과정 중 그 어느 하나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는 것. 138억 년 우주의 역사가 바로 당신을 위해 존재했다는 것을요. ”

우리 안에 담긴 우주의 역사 ⓒ 챗GPT

이 말을 듣고 나니, 오늘도 직장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나의 평범한 하루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내 삶이 때로는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일지 몰라도, 사실 그것은 138억 년이라는 긴 우주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모든 순간이 결코 남루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내가 누리는 문명과 생명은 과거 어느 별이 죽고 다시 태어나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주를 내 집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한없이 위대한 존재가 되지만, 내가 실제로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를 다른 사람들의 크고 화려한 집과 비교하는 순간 나는 초라해진다. 삶은 늘 도전적이고, 나의 불안을 끊임없이 저울질한다. 그래서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 농담처럼 “만약 내가 갑자기 바퀴벌레가 된다면 어떡할 거야?” 하고 묻는 식으로 내 삶의 위치를 재점검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갑자기 바퀴벌레가 된다면 어떡할 거야?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차갑고 어두운 아무것도 없던 우주로부터 생명의 역사를 거쳐 지금 이곳에서 살아갈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이렇게 긴 세월을 품고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각자의 삶은 충분히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더홈>을 보는 내내 복효근 시인의 시 「버팀목」이 떠올랐다. 생명이 시작되고 소멸하고 다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우주의 이야기는,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는 시 구절과 같은 맥락으로 다가왔다.

버팀목에 대하여 ⓒ CANVA

최초의 우주에서 쿼크와 렙톤이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채 우주의 시작을 만들어냈듯이,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건 참 의미심장한 일이다.

한편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 또한 같은 별의 후손이라는 사실이다. 우주만큼이나 광활한 가능성 속에서, 아이들이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신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길 기도한다. 그리고 그 여정을 함께 걷고, 곁에서 나란히 도우며 응원하는 것. 그것이 어른의 몫일 것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이 봄밤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꼭 들려주면 좋겠다. 하늘에 별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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