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가르친다는 허상
꽃을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꽃의 구조와 이름을 아는 것은 꽃을 진정으로 아는 것의 시작에 불과하다. 꽃에 대해 마인드맵을 그려보면 무수한 측면이 드러나지만, 우리는 그중 극히 일부만 다루고 있다. 매년 봄이 되면 수많은 유치원에서 통과의례처럼 아이들에게 봄꽃을 가르친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생각해봐야 한다. 유아들에게 왜 봄꽃을 가르쳐야 할까? "주변에 봄꽃이 보이니까"라는 답변은 너무 단순하다. 이 질문은 더 근본적인 고민, 즉 우리가 유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세상을 바라보게 해야 하는지에 연결된다.
봄꽃 이름 외우기, 꽃 만들기, 봄노래 부르기, 꽃을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그림책 읽기. 이것만으로 충분할까? 나비를 배울 때는 꽃을 배울 때와 다른가? 나비 종류, 성장 과정, 나비 꾸미기 활동, 나비는 꿀을 빤다는 단편적 지식. 주제만 바뀔 뿐 실질적으로 반복되는 활동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요즘은 AI가 생활 곳곳에 적용되면서 학교 교육이 아니더라도 책, 유튜브, 그리고 이제는 AI까지 다양한 출처에서 지식과 정보가 넘쳐난다.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정보의 신뢰성을 판단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대이다. 모두가 이제는 단순 지식보다 지식의 활용과 새로운 조합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유치원 교실에서는 여전히 "어린 학습자에게 기초지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이유로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는 경향이 있다.
바깥세상은 빠르게 변화하는데, 교실 안에서는 그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할 여유가 부족한 현실인 것 같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에서는 오직 실용적 지식만 중시하는 빅토리아 시대 교육을 이렇게 풍자한다.
맥초우컴차일드 선생은 최선을 다해 수업을 시작했다. 그와 백사십여 명의 다른 선생들은 백사십여 개의 피아노 다리처럼 같은 시간에 같은 공장에서 같은 원리에 따라 최근에 제조되었다. (중략) 아, 오히려 지나쳤구나. 맥초우컴차일드여. 조금 덜 배웠더라면 훨씬 잘 가르칠 수 있었을 텐데! (중략) 훌륭한 맥초우컴차일드. 끓는 기름으로 항아리를 하나씩 하나씩 가득 채워나가면, 안에 숨어 있는 상상이라는 도적을 언제나 깡그리 소탕하리라고 생각하는 건가-아니면 때로는 도적에게 상처만 입히고 모습을 일그러뜨리기만 하는 건 아닌가!(P.20-P.21)
'차라리 열심히 가르치지 말지'라는 디킨스의 비판이 새겨진 대목이다. 우리가 열심히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방식이 오히려 봄꽃을 제대로 가르쳤다는 착각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산업주의 시대처럼, 꽃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만 전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교사 시절, 나는 꽃의 이름을 알아야 다음 활동으로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꽃 이름 외우기, 퀴즈, 꾸미기, 꽃머리띠로 게임하기, 꽃으로 요리하기 등 특별함을 찾아 노력했지만 항상 아쉬움이 남았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교육 방식에 큰 변화가 없어 보여, 지금 우리가 봄꽃을 가르치는 방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어떤 꽃은 잎보다 꽃이 먼저 피고, 어떤 꽃은 낮고 조용하게 피어난다. 어떤 꽃은 혼자 화려하고, 어떤 꽃은 작지만 여럿이 모여 피어난다. 인기 동요 '모두 다 꽃이야'의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라는 가사처럼 말이다. 다양성과 포용은 말로만 전하는 가치가 아니다. 꽃들의 다양함을 통해 아이들도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라는 메시지는 교사의 머릿속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는 실제 감각과 경험 속에서 스며들어야 한다. 꽃을 꺾지 않는 규칙만 배운 아이와, 꽃의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과정을 경험한 아이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 동요를 만든 작사가도 분명 같은 바람을 담았으리라 생각한다.
교사는 유아들의 눈높이에 맞게 세상을 번역해 주는 사람
나는 교사가 유아들의 눈높이에 맞게 세상을 번역해 주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세상과 연결되는 그 다리가 얼마나 단단한지,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은 비어 있지는 않은지 늘 점검해야 한다. 자연을 가르치는 일에서 스스로 전문가가 아니라며 뒤로 물러서고 생태전문가에게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전문가들은 깊은 지식을 가졌지만,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전문 지식만은 아니다. 동시에 왜 이것을 가르치는지에 대한 성찰 없이 제한된 지식만으로 수업을 구성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유아들이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꼭 필요한 양분인지, 아니면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첨가물인지 우리의 수업을 잘 돌아봐야 한다.
봄이면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만 가르치고 이름, 색과 형태에만 집중하는 수업은 마치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평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유아에게 자연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먼저 던져보자. 그 답을 찾다 보면, 무엇을 가르칠지, 아이 곁에서 무엇을 함께 바라볼지 더 선명해질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들과 함께 자연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사가 선택한 꽃 몇 송이만 교실로 들여와 마치 편집샵이나 팝업스토어처럼 꾸미는 것은 자연을 온전히 경험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봄에 볼 수 있는 몇 가지 꽃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진짜 배움이 이뤄지기 어렵다.
길고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맞이한 봄의 경이로움, 꽃샘추위와 비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피어나는 여린 꽃잎, 봄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 활짝 핀 결과보다 그 과정을 들여다보는 시선. 교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사람들이 봄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온의 변화와 생명의 움직임을 느끼고, 그것을 함께 축하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연의 변함없는 리듬에 감탄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니 단순히 지적 사실을 알려주는 방식보다, 나뭇가지 끝마다 연둣빛이 차오르고, 잠들었던 봄눈이 뜨고, 자연이 감탄하고, 기뻐하고, 숨어있던 생명체들이 움직이고, 사랑하고, 넉넉해지는 모든 것들을 아이들과 함께 느끼는 교육이 필요하다. 아무리 유아 대상 수업이라 해도, 단순히 봄꽃 스티커로 예쁘게 꾸미는 활동만 반복된다면, 아이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독창적 시각을 놓칠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봄꽃을 가르치는지, 그 본질적 의미를 돌아봐야 한다.
『어려운 시절』에서 딸 루이자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묻는다.
"아버지, 제가 취향이나 상상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열망이나 애정에 대해, 그리고 그런 부드러운 감정들이 자랐을 수도 있는 제 성격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입증할 수 있는 문제나 파악할 수 있는 현실에서 제가 한 번이라도 벗어난 적이 있나요?"
이제 우리 교실에서도 이런 질문들을 다시 생각해 볼 시간이다.
* 중앙일보(2020.05.21.) 기사에 소개된 허보리 작가의 작품에서, 꽃은 가족 구성원 각자의 인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허 작가처럼 꽃 한 송이 한 송이의 얼굴에서 가족을 떠올리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꽃을 대하는 자세 아닐까.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8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