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도 있는 경험의 시간, AI 시대의 과제
A: 요즘 TV 만화는 예전만큼 재미가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어렸을 때 ‘머털도사’나
‘플란더스의 개’ 같은 만화, 참 재밌었는데요.
B: 맞아요. 그거 보려고 시간 맞춰 얼마나 기다렸게요? 일요일 아침에도 일부러 일찍 일어나고요. 저는 ‘뽀뽀뽀 유치원’ 보고 나서 유치원에 갔어요.
C: 그때 참 좋았죠. 프로그램이 많은 것도 아니었잖아요. 그거 하나 보겠다고
한 주를 기다렸던 거예요. 요즘처럼 몰아보기가 어디 있어요. 기다린 만큼 간절했죠.
B: 요새도 티니핑, 하츄핑 같은 거 그대로 유행이죠? 가끔 아이들이 그림 그리면서 설명하는데,
제가 모르는 캐릭터가 나와서 뭐? 뭐? 하고 되물을 때가 있어요. (웃음)
A: 저도 그래요. (웃음) 시대마다 유행하는 캐릭터가 다르니까요. 뽀로로는 요새 예전 같지 않죠?
점심시간, 비슷한 연배의 유치원 전담사들과 휴게실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제가 ‘옛날 이야기’로 흘러갔다. 우리... 어릴... 때... 올 것 같지 않았던 시간이 어느새 우리 앞에 와 있었다. 우리는 잠깐씩 멈춰 서서, 각자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그런데 묘했다. 추억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웃고 있었는데, 한쪽 마음은 자꾸 헛헛했다. 우리는 지금, AI 시대를 맞이하고 있으니까.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그건 속도도 아닐 거야
누군가는 더 이상 불필요한 노력이 필요 없는 시대라고 말한다. 노동은 사실 인간 역사에서 아주 오래된 개념이 아니고, 로봇의 몫이 될 것이며, 우린 기본 소득을 받으며 다른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또 한쪽에서는 AI의 급격한 성장으로 블루 칼라들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주니어 개발자를 키우려는 회사들이 없을 것이며, 스펙에 따른 채용보다는 자신이 쌓아 올린 스킬로 제안하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고 말한다. 휴~ 예전 같은 삶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AI 시대의 명암에 대해 많은 명석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사실 그 어느 하나 뾰족한 답은 없는 것 같다.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은 열렸다. 그 명암을 아직은 잘 모르겠다. SF 영화의 장면과 현실이 닮았다는 말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닌 시대다. 이쯤 되면 신년운세를 보러 갈 게 아니라, 과거 통찰력 있던 감독들의 SF 영화를 다시 뒤져봐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던 옛 어른들은 그 정도가 무슨 대단한 속도라고 그런 말을 지어냈나. 자고 일어나면 경쟁하듯 AI 개발자들이 쏟아내는 것들을 본다면, 그건 속도도 아닐 거야—라고 궁시렁거려 본다.
어른인 나도 이런 변화가 부담스럽고 불안한데, 아이들은 어떨까? 태어나서 이 세계를 배워야 하는 단계의 아이들은 ‘처음’을 어떻게 맞이하게 될까? 어른으로서, 교사로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교육에는 늘 시대의 흐름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지식의 ‘본질’, ‘정수’가 있다고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식은 새롭게 구성될 수 있다는 관점이 힘을 얻었다. 학습자를 이해하는 일이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도 함께 자리 잡았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절대반지’ 같은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학습자가 상황 속에서 맥락에 맞게 의미를 구성해 내는 일이 중요해졌다. 관계 속에서 협력하며 공동으로 지식을 만들어 가는 과정도 더 주목받게 되었다.
그동안 유치원은 3, 4, 5세 아이들의 ‘초기’를 책임져 왔다. 유치원 교육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기관이 아니었다. 아이가 관계 속에서 자라고, 몸으로 세상을 배우고, 말과 놀이로 마음을 채워지도록 돕는 곳이었다. 유치원 교육은 교육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 관계와 맥락을 중시하고, 연령별 발달 특성을 존중하며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 왔다.
AI, 이걸 어떻게 활용하지?
그런데 AI의 등장은 교육을 다시 흔들어 놓고 있다. 교육 현장에서는 마치 산업 분야에서 그러하듯, “이걸 어떻게 활용해야 하지?”라는 당혹감과 우려를 동시에 품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AI의 결과가 미흡하고, 할루시네이션 때문에 어린아이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문가에 가까워졌다”는 말이 나올 만큼,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이미 인류의 방대한 지식을 학습한 AI는 앞으로 더 정교해지고, 더 자동화되고, 더 자율적으로 실행하는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AI는 지치지 않는다. 감정의 기복도 없다. 늘 친절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주려 한다. 아이 입장에서, 모르는 것을 물어볼 때 수치심을 덜 느낄 수도 있다. 반복 설명을 요청해도 눈치 볼 필요가 없다. 학습을 할 때 이런 단계가 분명히 필요하다. 특히 ‘설명’과 ‘연습’이 중요한 시기에는 AI가 꽤 유용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설명보다 경험, 시간을 통과해야
하지만 유아에게 중요한 것은 ‘설명’보다 ‘경험’이다. 유아에게 교육은 머리로만 하는 학습이 아니다. 몸으로 겪고, 기다리고, 실패하고, 다시 해보고, 결국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과정이다.
누워 있던 아이가 뒤집는다. 뒤집고 나면 기기 시작한다. 기고 나면 걷는다. 걷는 동안 수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균형을 배운다. 어색하지만 깡충거리다가 어느 날 달리기 시작한다. 오래 뛰고 싶어 하다가, 숨이 차면 멈추는 법도 배운다. 몸을 조절한다는 건, 시간을 통째로 통과해야 가능한 일이다.
유아의 발달은 각각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신체, 언어, 사회성, 정서, 인지의 영역이 서로 엮여 함께 자란다. 그래서 유아기의 교육 내용은 ‘따로따로 쌓는 벽돌’이 아니라 ‘한꺼번에 엮인 직물’에 가깝다. 한 가닥만 잡아당기면, 다른 가닥도 함께 움직인다. 그만큼 유아에게는 밀도 있는 경험의 시간이 필요하다. AI가 ‘보여주고 알려주는 것’만으로는 이 시간을 대신하기 어렵다. 유아는 직접 몸으로 겪어야 뇌가 자라고, 마음과 관계도 함께 자란다.
또한 유아들마다 발달 과제를 마치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달리기가 가능해지고, 친구에게 관심이 생기고, 친구와 역할을 정하여 놀이가 시작되는 순간은 각자 다르게 온다. 씨앗마다 발아 속도가 다르듯, 유아도 저마다의 성장 속도가 있다.
그런데 AI가 이끄는 세계는 너무 빠르고, 너무 거대하다. 멋진 이미지는 휴대폰에서 순식간에 만들어지고, 알고리즘은 시청 이력에 따라 비슷한 류의 영상을 계속 추천한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AI는 기다림 없이 답을 내놓는다. 그래서 부모가 AI를 아무런 걱정 없이 가정에 들여올 때, 몇 가지 놓치는 지점이 생긴다.
예를 들면,
유아 수준에 맞지 않는 과도한 언어·학습활동을 무심코 사용하게 될 수 있다.
놀이보다 AI 결과물을 활용하여 유아가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범위까지 설명하려 들 수 있다. ‘잘 가르치려는 마음’이 앞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민감한 아이라면 부모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관심 있는 척’ 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이때 부모는 이를 AI를 활용한 학습의 효과라고 오인할 염려가 있다.
물론 여러 플랫폼에서는 유아 연령에 대한 이용 제한과 보호 장치를 두고 있다. 하지만 부모가 생활 속에서 AI로 이미지를 생성하고 대화하고 검색을 하며 영상물을 만드는 것이 익숙해지는 현실 속에서, 생활 속에서 그대로 그 제한을 지킬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바꿔보자. 노골적인 편리함과 효율성으로 포장된 AI 생성물이 유아의 생활 가까이 다가올 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신기해하는 아이의 탄성 너머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까?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