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얼마 전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오원 장승업의 <삼인문년>을 보았다. 특별 전시 첫날이었는데, 이 작품을 마주한 건 꽤 운이 좋은 일이었다. 세 신선이 서로의 나이를 묻는 장면인데, 표정이 가히 개구지다. 한 신선은 중국 고대 신 반고와 친구라고 하고, 옆에 있던 다른 신선은 뽕나무밭이 바다가 될 때마다 나뭇가지를 하나씩 집에 가져다 두었는데 그게 방 열 개를 채웠다고 말한다. 또 다른 신선은 삼천 년에 한 번 열린다는 복숭아를 먹고 산 아래 버렸는데, 그 씨앗이 쌓여 산 만큼 되었다고 한다. 그 산 아래에는 순진무구한 표정의 동자가 앉아 있다. 이 이야기는 그저 그들만의 농담이라는 듯, 동자는 무심하다.(전체전시 | 대구간송미술관 Kansong Art Museum Daegu)
나이가 곧 서열이던 시대에는 신선조차 허풍을 보태 ‘형님’이 되고 싶었나 보다. 요즘은 다르다. 나이는 더 이상 벼슬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어려 보이려 애쓰는 시대다. 안티에이징을 지나 슬로에이징으로, 우리는 길어진 수명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점에 와 있다. 기준이 바뀌면 서열도 달라진다. 지금의 관심사는 나이보다 기술에 가깝다. 어떻게든 변화에 적응해 자신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그 문제가 더 중요해졌다.
만약 저 세 신선이 현대에 환생해 다시 이야기를 나눈다면, 이런 허세가 오갈지도 모르겠다. “이보게, 나는 자고 일어나니 AI가 세금 정산을 끝내고 환급까지 받아 놓았더군.” “그 정도야 뭐, 나는 AI가 돈이 몰릴 만한 지역을 딱 찍어 주고, 빠져나올 타이밍까지 시나리오로 써서 올려 뒀다네.” “둘 다 시시하군. 나는 AI가 뽑아 준 복권 번호로 두 번이나 1등을 했다네. 자꾸 당첨되니 민망해서 지난번엔 우리 집 강아지 이름으로 받았지 뭔가.” 그들의 허풍은 더 이상 나이가 아니라, AI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가 될지도 모른다.
훗날, 우리 시대는 무엇을 기준으로 기억될까.
링크드인에 들어가면 많은 개발자들이 자신이 새롭게 만든 것들을 공유하며, 이직과 창업의 경험을 나눈다. AI 덕분에 이전보다 해낼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는 장밋빛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동시에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깔려있다. ‘미래 해킹’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며 AI 시대 선두에 서겠다는 각오를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나 역시 기대와 불안의 저울 위에 서 있는 것은 다르지 않다. 가끔 게릴라성 AI 연수가 열리면 무조건 신청해 듣고, SNS를 통해 새로 올라오는 소식과 뉴스를 따라가다 보면 그들이 시간 단위로 업데이트되는 정보를 얼마나 애써 쥐고 있는지 느껴진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쏟아지는 변화 속에서 과연 숨 돌릴 틈은 있는 걸까, 잠들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유치원 교육 현장은 어떨까.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검색 도구 수준에서 AI를 사용한다.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데서 멈추는 사람도 있고, 필요한 자료를 빠르게 만들거나 이미지를 생성하고 반복 업무를 자동화하는 데까지 활용하는 사람도 있다. 사용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교육 현장에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시선이 남아 있다.
AI가 빠르게 결과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 정서적으로 와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직접 경험하고 천천히 배우는 과정을 더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일이 버겁고 귀찮아 미루는 경우도 있고, 이 변화가 자신의 일과는 무관할 것이라 여기며 한 발 비켜서 있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AI의 흐름이 자신만을 비켜 갈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우리는 물리적 공간에서 직접 만나지 않아도 사회가 작동할 수 있다는 경험을 이미 했다.
우리가 그동안 가르쳐 온
지식은 무엇이지?
AI는 단순히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과 시간,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기준들에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가르쳐 온 지식은 정말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그럴듯하게 포장된 것이었는지. 협력을 이야기해 왔지만, 단순히 일을 배분하고 결과를 합쳐 놓은 것을 ‘성과’와 ‘협력’으로 포장해 온 것은 아니었는지 되묻게 된다. 역사를 배우고 예술을 보고 소설을 읽고 과학을 접하는 동안, 생각할 기회는 늘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충분히 질문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워라밸’이라는 말을 방패처럼 쥔 채, 스스로를 너무 쉽게 가여워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이런 물음 앞에서 나는 쉽게 고개를 들기 어렵다.
질문을 던지면 답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마냥 신기해하던 시간은 지났다. 이제는 웃음기 사라진 채, 이미 다가온 AI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사회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이 변화 앞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에 대한 논의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최근 구글이 공개한 ‘Teaching Responsible Use of AI’라는 문서를 읽었다. 교육 현장에 AI가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교육자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정리해 둔 자료였다. 구글 뿐 아니라 오픈 AI와 마이크로소프트도 교육 분야에서 AI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자료를 꾸준히 내놓고 있다. 그들은 AI가 교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을 위한 ‘사고의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 자료들을 훑어보며, 개발자들에 비해 교육자들이 이런 고민을 상대적으로 덜 해온 것은 아닐지 조심스러운 걱정이 들었다. 나 역시 그 질문을 미뤄둔 채, 유치원 현장에서 AI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판단의 기로에 서 있는 느낌을 받는다.
오늘 익힌 기술이 내일 대체될 수 있는 시대라면,
무엇을 끝까지 지켜야 할까?
서점가에는 교사들이 쓴 AI 활용 사례집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활용서를 따라가는 일은 분명 도움이 된다. 하지만 활용만을 좇다 보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쉽게 뒤로 밀린다. 오늘 익힌 기술이 내일 대체될 수 있는 시대라면, 무엇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특히 학습 중심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유아교육에서는 이 딜레마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아이들은 이미 일상 속에서 AI를 가장 쉽게 접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한 교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가정에서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으로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보는 유아가 늘면서, 역할 놀이에도 유튜브나 게임 장면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는 것이다. ‘놀이공원에 다녀온 유튜버 흉내’를 내거나, 종이로 유치원을 만들어 놓고 친구 모습도 종이 인형으로 만들어 카메라 앞에서 소개하면서 ‘유치원 놀이 방송’을 하는 식이다. 실생활의 변화가 아이들의 놀이 주제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또 어떤 경우에는 몬스터를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부모가 AI로 만든 영상을 준비해 왔고,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다만 그 영상의 모습과 목소리가 예상보다 강렬해, 교사는 틀어도 될지 한참을 망설였다고 했다. 가정 연계는 이제 물건이나 책을 가져오는 수준을 넘어, 무엇이든 ‘만들어’ 가져올 수 있는 단계로 넘어왔다. 무엇을 어디까지 연결할지,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줘도 되는지에 대한 고민은 이전보다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AI는 지나치게 가깝고 다정하고, 너무 쉬우니까
현장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어른이 기준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아이들의 주도성을 이야기하며, 아이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거의 모든 것을 허용해 버리는 순간이 생긴다. ‘좋아하는 것에서 주도성이 나온다’는 믿음은 강하다. 다만 AI는 지나치게 가깝고 다정하며, 무엇보다 너무 쉽다. 그래서 경계가 필요하다. 누구나 빠르게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유아에게 그 생성물을 건넬 때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쉽게 뒤로 밀린다. 이 글에서는 ‘AI를 써도 되느냐’를 묻지 않으려 한다. 대신 유아의 발달을 기준으로, 무엇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를 천천히 생각해 보려 한다.
하루만 지나도 AI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는 눈에 띄게 달라진다. 하나의 이미지를 넣으면 앞뒤 장면을 덧붙여 영상으로 만들어 주고, 움직임과 생동감까지 자연스럽게 더한다. 아이들은 그 변화를 마술처럼 받아들이고, 어른조차 그 속도를 따라가기 벅찰 때가 있다.
작년 가을, 한 선생님이 아이들이 재활용품으로 만든 로봇을 사진으로 찍어 AI 앱에 넣고 동영상으로 보여준 적이 있다. 화면 속 로봇은 불꽃을 뿜으며 곧 하늘을 날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환호했다. 흥미는 분명 커졌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한 가지 생각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이들은 자신이 만든 로봇을 보고 있었을까, 아니면 교사의 휴대폰 화면 속 로봇에 더 마음을 빼앗겼을까. 이때 유아의 창작물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손으로 만든 로봇일까, AI가 덧입힌 결과물일까. 아이가 마음속에 ‘내가 만들었다’고 남기게 될 것은 무엇일까.
창작물이라면 주인은 아이여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또 보여 주세요”라고 말하며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최종 결과물은 교사의 휴대폰 안에 남아 있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작품’으로 남는 것은 무엇이며, 그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 나는 아이들이 자신의 작품을 끝까지 자기 것이라고 느끼며,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해 동영상으로 변형했을 것이다. 그 마음이 아이들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분명하다. 다만 그런 순간마다, 우리는 혹시 무엇을 함께 지나쳐 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서툰 과정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어른의 눈에 ‘완성’으로 보이는 결과를 조금 더 빨리 기대해 버리기도 한다. 아이가 긁적이며 그린 그림, 삐뚤빼뚤한 글자와 그림을 공들여 쓰고 “붙여 주세요”라고 말하는 그 과정도 어느새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지 모른다. 그렇게 소중한 시간들이 조용히 뒤로 밀려나는 순간이 생긴다.
선생님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부모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하루의 피로와 일정 속에서 휴대폰이 아이에게 건네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휴대폰이 좋지 않다는 것을 부모는 이미 알고 있다. 가능하면 보여주지 않는 게 좋다는 말도 알고 있다. 하지만 밥을 해야 하고, 전화를 받아야 하고, 잠깐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은 ‘아이와 놀아줘야 한다’는 마음과 ‘오늘 하루만큼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마음 사이에서 타협한다. 나쁜 마음이어서가 아니라, 하루가 빠듯해서다. 그럴 때 AI는 휴대폰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AI는 아이에게 말을 건다. 아이 이름을 넣어 이야기를 만들어 주고, 질문을 받아주고, 칭찬도 한다. 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또 보여줘!”라고 말하면, 부모는 잠깐 안심한다. “이건 공부 같기도 하네” 하는 마음도 든다.
AI는 아이가 주도권을 잡기 어려운 도구
그래서 더더욱 아이에게는 매체와 재료를 충분히 탐색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손으로 만지고 움직여 보며 “이건 이런 느낌이구나” 알아가는 동안, 대상에 대한 이해가 쌓이고 생각도 조금씩 자란다. 반면 AI는 아이가 주도권을 잡기 어려운 도구다. 화면이 화려할수록 아이는 그걸 다룰 수 있는 어른 쪽으로 자연스럽게 기대게 된다.
유아는 또래와 부딪치며 많은 것을 배운다. 깔깔거리며 웃다가도 다투고, 화해하고, 마음을 풀어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친구에게 양보해 보고, 동생에게 놀잇감을 나눠 주며 ‘주고받는 기쁨’도 배운다. 이런 관계의 경험은 정답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 속에서 몸으로 익혀 가는 것이다.
아이의 시간을 끝까지 기다려 줄 수 있을까
그런데 AI가 만들어 내는 결과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과정이 아닌 결과를 보게 된다. 생산성이 주는 편리함에 마음이 쏠릴수록, 아이가 서툴게 겪어야 할 시간을 끝까지 기다려 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남는다.
유아에게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 시기가 있다. 그래서 완성된 결과부터 보여 주는 방식이 늘 정답은 아닐 수 있다. AI가 유아의 생활에 가까이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다음으로 걱정되는 지점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어떤 이미지가 실제 장면을 찍은 것인지, 어떤 이미지가 생성된 것인지는 아이의 눈에는 더더욱 구분하기 어렵다. 교육적 목적에 따라 AI로 만든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도 분명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미지가 어떤 기준으로 선택되었는지, 그리고 한 번 더 걸러볼 의지가 있었는지에 있다. 기준 없이 생성된 이미지가 여과 없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그대로 남는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예를 들어 옛날이야기에 필요한 이미지를 만들 때, AI는 우리나라의 전통복장과 중국의 전통복장을 헛갈리기도 한다. 교사가 줄거리에 집중해 이미지를 만들어 들려줄 때, 아이들이 어른의 의도대로만 보고 느끼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미처 보지 못한 문양을 발견하고, 작은 장식과 색의 차이를 짚어낸다. 디테일을 알아차리는 힘은 오히려 유아들에게 더 강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미세한 차이까지 함께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을까. 틀린 정보가 섞인 이미지를 다시 생성하고, 또 확인하고, 또 수정하는 일을 귀찮아 하지 않고 감당할 의지가 교사에게 있을까. 편리하다는 이유로,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넘어가는 순간은 없을까.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시간을 차지해도 되는 것인지,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AI가 사회 전반을 빠르게 바꾸는 지금, 유치원 현장에서 생각해 볼 AI 리터러시의 기준은 이렇다.
첫째, AI를 쓰더라도 아이가 직접 해보는 시간을 앞에 두는 것이 좋다. 먼저 만지고, 그려보고, 만들어보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AI는 그 뒤에서 ‘도와주는 역할’이면 충분하다. 예를 들어 아이가 만든 로봇을 바로 영상으로 바꿔 주기보다, 아이가 먼저 자기 말로 로봇을 소개하게 하고(“이 로봇은 뭘 할 수 있어?”), 친구들과 이름을 정하고, 움직임을 상상해 보게 하는 시간이 앞에 와야 한다. 아이가 상상한 세계를 손으로 만들고, 창의적인 작업의 주인이 되는 시간이다. 그리고 작품을 함께 바라보는 단계에서야, 다른 친구를 초대하듯 AI를 불러 "너라면 로봇에게 어떤 장치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처럼 하나의 의견을 듣는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 아이의 손과 입이 먼저 움직이고, AI는 나중에 등장해도 늦지 않다.
둘째, 아이가 AI의 빠른 결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어른이 속도를 조절해 줄 필요가 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는 방해받지 않는 느린 상상이 필요하다.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생각을 채우는 시간, “다음엔 어떻게 될까?”를 기다리는 시간이 배움이 된다. 앞 장면과 이어지는 마음을 떠올리고, 방금 들은 말 한마디를 다시 곱씹고, 다음에 일어날 일을 스스로 짐작해 보는 시간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AI는 그 빈칸을 순식간에 메워버릴 수 있다. 그래서 화려함을 더하는 것보다, 일부러 비워 두는 장면을 남겨두는 일이 중요해진다. 상상은 속도가 아니라 여백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셋째, 교사는 AI에 기대는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유아의 배움은 주변 세계를 관찰하고 다양하게 감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보고, 만지고, 움직이고, 실패하고, 다시 해보는 과정에서 생각이 자란다. 그런데 AI는 말로 설명을 아주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어른은 무심코 “AI가 말했으니 정답이야”라는 분위기를 만들기 쉽다.
그래서 유아 앞에서는 ‘AI가 정답’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말과 태도를 한 번 더 점검해야 한다. 대신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 말이 진짜일까?”, “다르게 말해 볼 수도 있을까?”를 묻는 쪽이 더 중요해진다. 실제로 같은 질문을 해도 AI는 다른 답을 내놓을 수 있고,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답의 결도 달라진다. 그러니 AI를 ‘척척박사’가 아니라, 하나의 참고 의견, 또 하나의 관점으로 받아들이게 도와야 한다.
AI 리터러시는 실종 예방 교육과 닮아 있다
나는 AI 리터러시는 실종 예방 교육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겁주기 위한 교육이 아니다. “이젠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라고 불신하고 불안해하기보다, 한 번 더 상황을 살피고 판단하는 감각을 키우는 교육이다. 마음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다가와 무언가를 부탁할 때, 유아에게는 세 가지를 연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상하면 멈추기, 혼자 결정하지 않기, 어른에게 도움을 청하기. AI에 대한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이든 바로 믿기보다 잠깐 멈춰서 ‘진짜인가?’를 살펴보는 연습, 어색한 부분이 없는지 한 번 더 보는 습관, 화면이나 설명이 말해준다고 해서 곧장 정답이라고 여기지 않는 태도. 그리고 조금이라도 헷갈리면, 혼자 넘기지 말고 어른에게 묻는 것. AI 리터러시는 결국 ‘의심하라’가 아니라, ‘한 번 더 확인하는 습관’을 아이의 몸에 익히는 일에 가깝다.
멈추기-혼자 결정하지 않기-어른에게 물어보기
그래서 AI를 만날 때,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AI는 재미있는 도구야. 그런데 사용하는 건 우리야. 언제, 어떻게 쓸지는 우리가 정하는 거야.” “우리도 해볼까? 나는 네 생각이 참 멋지다고 느껴.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아.” “헷갈리면 엄마나 선생님에게 물어보자.”
요즘은 아이 목소리를 흉내 내 부모에게 전화를 거는 보이스피싱 이야기까지 들린다. 연예인이나 공인이 아니어도, ‘내가 나’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성큼 와 있다. 그래서 더 시급한 것은 기술에 기대어 만드는 그럴듯함이 아니라, 아이와 연결되어 함께 나누는 이야기와 경험이다. 같이 만들고, 같이 웃고, 같이 기억하는 시간 말이다. AI가 무서운 속도로 앞서갈수록, 아이가 자기 속도로 자랄 수 있도록 지켜 주는 교실의 기준은 더 또렷해야 한다. AI 시대의 유아는 데이터를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창의성과 공감과 시도를 통해 ‘나’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바다 사진을 보여주는 것과, 바다를 찾아가 파도 소리를 직접 듣게 하는 것은 애초에 같은 경험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