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는 안 되겠다. 그만하고 자자."
어젯밤, 때아닌 깊은 우울감이 찾아왔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는 법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의 감정을 조용히 곱씹어 보았다. 무엇이 나를 흔들었던 걸까.
종일 내린 비로 스산했던 날씨, 누적된 피로로 급격히 저하된 에너지. 이 두 가지가 겹치면 감정의 곡선은 어김없이 하락한다. 먹구름이 잔뜩 낀 날처럼, 언제든 소나기가 쏟아지고 천둥이 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된다. 이런 날엔 아이의 칭얼거림도, 몇 년째 정리하지 못한 채 방치된 물건들도 신경을 긁어댄다. 평소라면 그냥 넘겼을 사소한 실수에도 유독 예민해진다.
어제가 딱 그런 하루였다. 하필 아내의 생일이었고, 저녁엔 외식까지 하고 돌아왔는데, 하루의 끝에서 나는 완전히 바닥이었다. 컨디션 탓이라 넘길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꼼짝없이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감정의 흐름을 거스르려고 음악 작업을 시작했지만, 침묵 속에서 부정적인 공상은 제멋대로 세를 불려 갔다. 결국 작업을 멈추고 새벽에 거실로 나와 TV를 켰다. 누군가 떠드는 소리라도 들으면 나아질 것 같았다. 다행히 효과가 없진 않았다. 마침 Show Me The Money를 보았다. 세상 높은 자존감과 자신감으로 무장한 래퍼들의 랩은, 마음이 가라앉을 때 의외로 도움이 된다.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에너지 레벨이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안다. 감정의 저지선이 뚫릴 때마다 내 몸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알레야, 지금 당장 균형을 신경 쓰지 않으면 곧 퍼질지도 몰라."
부족한 잠을 뒤로하고, 아이 등원을 마치자마자 산책길에 올랐다. 아침 공기가 생각보다 쌀쌀해 잠시 망설였지만, 마음먹은 대로 그냥 걸었다. 귀가 시렸지만 마음은 점점 개운해졌다. 독소가 빠지고 새로운 기운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다이어리를 꺼냈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적어 내려갔다. 마지막 찌꺼기까지 비워낸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펜을 잡으니 손이 저려왔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두서없는 기록 속에, 막연하게나마 바라던 삶의 모습도 함께 적혔다.
오늘은 늘 먹던 요구르트와 식빵 대신 밥과 국으로 하루를 열었다. 오랜만이었다. 마음을 새로 하고 속까지 든든하게 채우니, 지난밤이 무색해질 만큼 기분 좋은 하루가 흘러갔다. 플리 작업에 밀려 제대로 읽지 못했던 책도 펼쳤다. 오랜만에 루틴을 되찾은 것 같았다.
회사를 떠난 뒤로, 출퇴근이라는 명확한 경계와 매출 달성이라는 목표가 사라지면서 가끔은 균형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온다. 균형이 무너지면 컨디션이 나빠진다는 걸 알면서도,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건강을 내거는 선택을 반복하곤 한다.
지난 5년간, 알면서도 반복했을 만큼 불안감은 여전히 거부할 수 없는 중력처럼 나를 끌어당긴다. 한때는 그것을 극복하려 했지만, 이제는 잘 흘려보내는 데 더 집중한다. 가벼운 산책과 건강한 음식만으로도 대부분은 금방 회복된다는 걸 몸으로 알기 때문에, 예전처럼 불편한 감정에 오래 붙잡혀 있지 않는다.
늘 제자리인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답답할 때가 있다. 하지만 글로 되새김질해 보면, 단 한순간도 진짜로 제자리였던 적은 없었다. 삶은 언제나 무언가 하나를 가르쳐준다.
어느 날 또다시 그런 밤이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 걷고, 밥을 먹고, 펜을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