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산통일 뿐이고 진통 끝에는 해산의 기쁨이 있다.

- 그렇게 우린 가족이 되었다.

by 알레

사람이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해 가정을 이루고, 그다음에는 자녀를 출산하여 양육을 하고 어느새 다 큰 자녀를 떠나보내며 여생을 살다 떠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인생이 참 쉽고 간단해 보인다. 그런데 살아보니 인생 쉬운 거 하나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2013년 6월 22일. 7년간의 연예를 마치고 결혼에 성공했다. 오랜 기다림이 있었던 만큼 기쁨이 컸다. 우리 둘 다 아이를 좋아했기에 가정을 이루고 나니 자연스럽게 출산 준비를 시작하였다. 인생에 결혼도 처음이니 아이를 갖는 것도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함께 병원에 가서 몸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대기하며 이름이 불리기 전까지 이게 뭐라고 괜스레 떨리기까지 했다.


아내는 산부인과에서 나는 비뇨기과에서 각자 검사를 받고 난 후 결과를 기다렸다. 기대와 다르게 우리 둘 다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의 표현 중 기억나는 한 마디는 '경계선에 있어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해를 넘기면 더 이상 아이를 갖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을 하셨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가슴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경계선'이라는 말이 참 모호한 표현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생각해보게 된 것 같다. 긍정도 부정도 어느 쪽으로도 단정 지어 생각해볼 수 없는 그런 상태. 그것이 '경계선'이 주는 애매한 감정이었다.


나보다 더 충격을 받은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굳이 열심히 긍정의 말들을 늘여놓았다. 그러나 처음 해보는 산전 검사의 충격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그렇다고 이미 살아온 인생을 되돌릴 수도 없는 법이니 앞으로를 최선을 다해 준비해보는 방법밖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제야 뭐 하나를 먹어도 몸을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을 보면 우리 인생에서 '아기'라는 존재의 의미는 매우 컸음을 떠올려보게 된다.


한 참이 지난 어느 날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테스터기에 표시된 두 줄. 너무 기뻤고 감사했다. 여전히 우리의 머릿속에 '올해'라는 시간의 제약은 무의식 속에 마치 우리를 시한부인 것처럼 옥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됐다. 이제 됐다.'라는 생각에 주체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정기적으로 피검사를 해보았지만 더 이상 호르몬 수치가 오르지 않았다. 결국 첫 아이는 우리 부부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작별을 고했다.


무엇이든 처음은 항상 오래간다. 이왕이면 처음이 행복이었길 바랬지만 우리의 처음은 절망이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담당의사의 데드라인도 이미 넘어서버렸다. 이대로 끝난 줄 알았다. 결혼할 당시 이미 30대 후반이었던 아내는 알게 모르게 자책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게 어디 아내만의 문제이겠냐만은 한 여성으로서 감당하게 되는 절망의 무게는 지금도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그저 그 시간을 감당해준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정말 이렇게 끝이었을까? 아니다. 두 번째 임신. 처음의 경험이 절망이었기에 임신 소식을 알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일단 확실해질 때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또 절망이었다. 자궁외 임신. 아이는 크지 않았다. 아내는 결국 입원을 해야만 했다. 또 한 번의 절망이 쌓였다. 착잡했다. 뭐가 그리 어려울까. 남들은 그저 하나도 모자라 둘셋 잘 도 생기는데 왜 우리는 하나도 이렇게 힘든 걸까. 원망도 했지만 지금은 내 감정보다 아내가 우선이었기에 아내의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더 애를 썼다.


두 번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경험하고 나니 당분간은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냥 둘 다 자연스럽게 회피해버린 것 같았다. 마치 그것이 금기어인 것처럼. 사실 마음속에 바람은 여전했다. 조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친구들의 아이가 자라나는 것을 볼 때마다 좋으면서 좋지 않았고 웃으면서 웃지 못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세 번째 임신이 되었다. 이제는 기쁨보다는 학습된 불안이 먼저 찾아왔다.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울먹이며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자기야, 무슨 일인데?', '괜찮아?', '의사가 뭐랬는데?' 물어봤지만 한 참이 지나 겨우 말을 꺼낸 아내에게 들은 말은 충격이었다. '이번에는 자궁각 임신이래. 이 경우에 그냥 놔두면 더 큰일이 생길 수 있으니 수술을 해야만 한다는데,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개복하여 자궁을 적출할 수도 있데'. 힘겹게 말을 이어가던 아내는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원망스러웠다. 상황도, 의사도 원망스러웠다. 안 그래도 심적으로 약해진 아내에게 의사랍시고 모든 상황을 고지해야 한다는 의무감만으로 충격적인 수술 경위를 꼭 지금 다 전달했었어야만 했을까. 괜한 감정의 화살이 의사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우린 당장의 결정을 보류한 체 다른 병원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복강경 수술 전문의를 소개받았고 담당 선생님은 별 것 아닌 수술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부터 시켜주었다.


수술을 잘 마치고 입원 치료를 받은 후 집에 돌아왔다. 세 번의 절망. 세 번째에는 결국 한쪽 나팔관을 잃어버리는 상흔이 남겨졌다. 그리고 아내의 배에는 수술의 흉터가 버젓이 남아 이제는 떠올리기 싫어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이리도 힘든 것인 줄 상상도 못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아내는 홀로 다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 너무 속상했다. 내 몸이 아니기에,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말 그대로 난 노력해야 겨우 마음에 닿을까 말까 한 정도일 뿐이다. 그게 남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에 스스로가 너무 무기력해 보였다. 그 모진 시간 동안 아내 속은 정말 얼마나 힘들었을까.





결혼한 지 어느새 7년이 흘렀다. 2020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시험관을 해보기로 했다. 정말 할 수 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길 바란다는 말을 하고 싶다. 시험관을 준비하기 위해 아내가 감당해야 하는 시간은 옆에서 보기에 너무 처참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나마라도 과배란이 잘 되면 모를까, 겨우 한 개 두 개를 건질 정도였다. 그렇게 몇 개를 건져 그중에 확률이 높아 보이는 것을 추려냈더니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딱 세 개였다.


시험관을 시도하면 보통 처음에 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낮다고 들었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다. 한 번에 다 끝낼 것인가 아니면 그마저도 둘, 하나로 나눌 것인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민한 끝에 아내와 내린 결론은 한 번에 다 시도하는 것이었다. 정말 여기서도 안되면 이젠 포기하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2021년 1월 22일, 기쁨이가 태어났다.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라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기쁨이 아버님, 이쪽으로 잠시 오시겠어요? 손가락 10개, 발가락 10개, 눈, 코, 입, 귀, 모두 정상이에요.' 신생아실 간호사 선생님의 말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얼떨떨한 상태로 지지한 표정으로 선생님의 말에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너무 좋아 방방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술실에서 돌아온 아내를 보며, 기쁨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첫 만남의 감격을 빠짐없이 말해주려고 노력했다. 제왕절개를 한 아내는 몸을 가누기 힘들어 고통스러워했지만 아내의 얼굴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엄마가 되었고 아빠가 되었다.


세 번의 절망 끝에 만난 네 번째 아이. 현호는 이제 나름 제 고집이 생긴 떼쟁이가 되어 엄마 아빠랑 힘겨루기를 하는 아이가 되었다. 엄마, 아빠를 연신 불러대며 방긋 웃는 아가는 만병통치약이다. 욱하는 감정이 올라올 때도 있지만 이 아이가 주는 기쁨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기에 이제는 결국 아이에게 지고 마는 아들 바보 아빠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부부에게 세 번의 유산이 남긴 절망은 더 이상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사실 그럴 정신도 없을 만큼 개구쟁이 한 명이 매일 정신을 쏙 빼놓고 있다. 현호의 태명은 기쁨이었다. 우리에게 이 아이의 존재는 기쁨 그 자체이다. 모든 절망과 아픔을 씻어준 빛이고 사랑이다.


모든 것이 다 지나서야 그 시간을 돌이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의 유산으로 겪은 고통은 산통일 뿐이었고 진통 끝에는 해산의 기쁨이 있었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완전한 가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