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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레 Jul 08. 2022

애매함은 가능성이다

- 중간지대의 저주에서 가능성의 축복으로

'글쎄요, 제가 뭘 잘하는지 애매해요.' 

'할 줄은 아는데, 그게 저의 강점이라고 말하기는 좀 애매해서요.'


어쩌다 보니 이런 표현들을 입에 달고 살아왔다. 습관처럼 내뱉는 '애해함'은 마치 스스로를 낮추는 표현처럼 혀 끝에 배어있는 표현이 돼버렸다. 말에는 힘이 있어 점점 나를 그 틀 안에 가두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틀에 갇혀있다고 느껴질때면 맴도는 생각들이 있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나를 말하는데 확신이 약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을 낮추며 사는 것이 삶의 미덕이라고 배워서일까? 아니면 타인에 대해 늘 말을 아끼거나 좋은 말만 해주는 문화가 나에 대한 진실된 평가조차 신뢰하지 못하게 만든 것일까?'  


'애매하다'라는 표현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다'라고 나와있다. 자기 계발을 시작하고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말을 알게 된 후로 자주 듣게 되었던 표현이 '뾰족하게 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이 표현과 비교해보면 애매함이란 차선도 차차선도 아닌 마치 빠져나오기 힘든 미로처럼 보였다. 


그런데 생각을 조금만 달리해보면 애매함이 오히려 재능이 될 수 있고 반전의 물꼬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 '애매하다'는 표현은 의외로 전문가들도 자주 쓰는 표현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전문가들은 해당 분야에 자격을 검증받은 사람 들인 만큼 다양한 솔루션과 경험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의외로 전문가들도 '좀 애매하긴 한데-'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누군들 삶에 대해 명료하게 답을 내릴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애매함은 전문성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영역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삶이 원래 그런것이다.

 


2. 애매한 재능이 모여 나만의 영역이 된다.


세상에 단 한 가지의 재능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소소한 것들까지 꺼내 늘어놓기 시작하면 한 사람이 가진 재능의 가짓수는 수십 가지는 될 것이다. 거기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재능이나 새롭게 정의되는 것들까지 더해보면 누구나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잠시 2분 정도 시간을 갖고 떠오르는 대로 나의 애매한 재능을 적어보았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 것들 모두 전문성을 가진 재능들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합쳐져 취향의 영역이 되고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이 중 몇 가지는 지금의 나를 이전의 나와 다른 사람으로 브랜딩 시켜주는 재능이 되었다.


만약 스스로가 애매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들을 떠오르는 대로 기록해본 후 몇 가지를 결합시켜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3. 애매한 것은 모든 것의 가능성이다.


타고난 재능, 선천적인 탁월함이라는 것도 발견된 순간에는 아직 미성숙한 상태이다. 반복하여 기량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어느 시점에서야 그것이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하면 임계점을 돌파하기 전까지 그 재능은 여전히 애매한 상태라는 것이다. 


할 줄 아는 것은 많은 듯한데 잘한다고 하기에는 애매하다고 느끼면 위축될 수 있다. 어떤 한 가지를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애매한 재능이 많을수록 제너럴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양한 것들을 조금만 더 발전시키면 의외로 초보에서 준 전문가의 단계로 올라설 수 있는 것들도 많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이제 애매한 재능에 대해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주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의외의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 








사실 애매하다는 말은 내가 나 자신에게 정말 많이 쓰는 표현이다. 나의 애매함의 역사는 중고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적은 언제나 중상위권을 유지했던 그 시절, 나는 언제나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아닌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늘 이런 나의 삶을 '중간지대의 저주'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다. 상위권은 이미 잘하는 사람들이니 대체로 잘 풀린다. 하위권은 애초에 다른 길을 선택하고 의외로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중간지대에 있는 사람은?


조금만 발버둥 치면 위로 올라갈 것 같아서 부단히 애쓴다. 동시에 잠시라도 멈춰 서면 아래로 곤두박질 칠 것 같아 맘 편히 쉬지 못한다. 그래서 늘 괴롭고 스스로 애처롭다. 20여 년을 이런 마음으로 살다 보니 정작 내가 나에게 가장 인색한 사람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진심 어린 칭찬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어느새 마음속에서 새어 나가 버렸다. 


이제는 나의 애매함을 축복으로 여기기로 했다. 컵 안에 남겨진 물을 보고 가진 것과 부족한 것을 인식하는 것은 한 끗차이 임을 알 수 있듯, 애매함이 가능성이 될지 저주가 될지는 아주 작은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재능이 돈이 되는 세상을 살다 보니 재능을 선점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이 언제나 내가 가진 것들을 작게 보이게 만들었다. 마치 돈으로 연결되지 않는 재능은 점점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왔던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나의 가진 것들을 사랑해주자. 내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데 세상이 나를 인정해주길 바라는 것은 잘못된 바람이다. 만약 지금까지 중간지대의 저주를 바라보고 있었다면 고개를 돌려 가능성의 축복을 바라보자.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연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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