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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록하는 삶

- 불렛 저널을 시작했어요

by 알레

"알레 님 글씨 잘 쓰는데요?"

"알레 님, 글 잘 쓰잖아요."

"알레 님, 그림 좀 그리시는데요?"


제가요?



인생이 참 재미나다. 살다 보니 내가 별소리를 다 듣는다. 오랜 시간 나를 알고 지낸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소리다. 그 누구보다 나를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은 나 자신이다. 이런 칭찬이 그저 낯설기만 한 것은 내가 나를 알기 때문이다.


그나마 글쓰기는 한 편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다.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글씨? 그리고 그림? 말 그대로 언빌리버블이다. 우리 집에서 아버지와 형은 글씨를 잘 썼다. 어머니는 잘 쓰는 글씨체는 아니었지만 딱 어른 글씨 같은 느낌이었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나만 글씨를 못썼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왼 손으로 쓰나 오른손으로 쓰나 도긴개긴이네'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심지어 초등학생 조카가 나보다 잘 쓴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가 글씨를 잘 쓴다고 한다. 당신이라면 쉽게 믿어지겠나?


정말 크게 인심 써서 글씨까지도 받아준다고 치자. 그런데 그림은 정말 '살다 살다 이런 소리까지 들어보네'라는 심정이다. 뭐 이렇게까지 말하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미술이라는 영역은 이미 중학생 때 포기한 영역이다. 내가 기억하는 인생 최초 포기의 순간이 미술이었다.


글이나 글씨야, 살면서 전혀 동떨어져 살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 그래도 알게 모르게 기본기는 쌓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림은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는 여태 그려본 적이 없다. 그럼 대체 뭘까? 왜 나한테 그림 좀 그린다고 하는 거지? 누굴 놀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두 가지 이유를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이유: 의외성의 발견


우선 그림에 대한 칭찬을 어디에서 들었냐가 중요하다. 최근 나는 불렛 저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쉽게 생각하자면 다이어리인데,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한 방식으로 나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 요즘 또 하나의 트렌드라고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한 친구가 알고 보니 불렛 저널 장인이었다. 그 친구 덕분에 소심하게 시작해본 불렛 저널. 처음에는 필사를 목적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친구의 가이드를 따라 나를 기록하게 되었다. 소위 다꾸족이라고 불리는 금손들의 노트를 보면 다채로운 감성이 담긴 스티커와 마스킹 테이프, 잡지 등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공간을 장식한다. 나는? 전혀 불가능한 분야다.


뛰어난 필재를 가진 사람이라면 글씨만으로도 여백의 미를 살려가며 눈길이 갈 만한 노트를 쓸 수 있겠지만 이 또한 나와 상관없으니, 내가 선택한 건 그냥 끄적임 정도의 그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티커를 활용할 때 내용과 연관 있는 아주 간단한 그림을 삽입한 것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왔는가 싶다.


또 다른 의외성은, 나이 마흔이 넘은 중년의 남자가 투박한 손으로 펜을 움켜쥐고 깨작깨작거리는 모습이 조금은 눈에 띄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커뮤니티 채팅방에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 부분도 나름 신빙성이 있다.



두 번째 이유: 가능성의 발견


무엇하나 꾸밀 줄 모르는 사람이 숨을 죽이고 손을 부들부들 떨며 스티커 한 장이라도 붙이는 장면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가능성의 불씨가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스스로 의미를 붙여 보았다.


달리 필재가 없는 나로서는 별 것 아닌 간단한 기록도 정갈하게 줄이라도 맞출라고 치면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그만큼 온몸으로, 온 신경을 다 써야 겨우 한 줄이다. 그런 사람이 불렛 저널이 재밌다고 해외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며 레퍼런스를 수집한다. 그중에 따라 해 봄직한 것을 발견하고는 해당 유튜버가 사용한 펜을 검색해 몇 자루 구입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대개 엄청난 실력자를 선망하고 열광하지만 의외로 진한 감동은 뒤뚱 거리며 한 발 짝 한 발 짝 불안한 발을 내딛는 아기를 볼 때 더 크게 밀려온다. 그만큼 누군가의 성장과 한 발 짝 내딛는 용기는, 망설이는 사람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앞서간 사람에게는 손뼉 쳐주고 싶은 자애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아마 나를 보며 그들도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어쩌면 나를 보며, '쟤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하지 않을까.


무엇이든 됐든 난 좋다.






기록을 시작하고 나니 이렇듯 참 재미난 일들이 벌어진다. 생각해보니 고등학생 때 한참 다이어리 꾸미기가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그때는 핸드폰도 없었던 시절이라 다이어리가 모든 기록의 저장고였기에 해마다 다이어리를 꾸미는 것으로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벌써 20여 년이 더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이제와 다시 불렛 저널을 시작하니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때와는 또 다른 감성으로 나를 기록하는 요즘. 하루가 참 즐겁다. 기록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참 많은 것을 기록하며 살아간다. SNS에, 메모장에 다양한 기록을 남긴다. 나 역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메모장 앱에는 그동안 모아둔 글감이 한가득이다. 기록도 검색도 편리한 디지털 기록과는 달리 불렛 저널은 여러모로 손품이 많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좋은 것은, 과거의 나를 다시 만나게 해주는 경험과 그 순간만큼은 나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져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렛 저널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시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오늘 나의 솔직한 기록이, 시간이 지나 언젠가 나에게 와닿을 것이다.

그러니 삶을 풍요롭게 살길 원한다면, 오늘부터 나를 기록하는 삶을 살아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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