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냥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냥의 힘'을 알고 있는가?
‘그냥’은 나에게 마법 같은 한 단어가 되었다.
과거에 '그냥'이라는 답변은, 생각 없이 내지른 것을 어찌 수습해야 할지도 모를 때 하는 말,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말, 또는 말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음을 드러내는 말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금에야 나는 이 한 단어의 힘을 깨닫게 되었다.
최근 우연한 기회로 팟캐스트의 오페라 채널에 패널로 참여하게 되었다. 본래의 목적은 해당 채널의 PD님을 만나 콘텐츠에 대한 조언을 듣고자 함이었는데 겸사겸사 일일 패널이 되는 기회를 얻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오페라를 1도 모르는 사람이다. 여태 오페라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다. 이런 내가 패널로 참여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경우지만 그냥 경험이다 생각하고 들어가 보았다.
결과는? 난 처음으로 오페라라는 장르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더 알고 싶어졌다. 스토리 라인부터, 구성, 각각의 요소, 대표작들,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심지어 이탈리어까지. 세계적인 대작, 베르디의 리골레토에는 복잡 다양한 인생이 축약되어 있었고, 현대의 드라마나 영화의 주요 소재가 모두 들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점심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에서는 콘텐츠 크리에이터에게 필요한 자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론적으로 많이 시도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초기에는 다양한 시도를 해보면서 내 것을 찾아가는 게 시간을 절약하는 길이라는 조언과 함께 코너 하나를 진행해보라는 제안까지 받게 되었다.
생각지도 않게 훅 치고 들어오셔서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그냥 해보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 하루를 돌아보며 내가 깨닫게 된 '그냥'의 가치가 나다움을 발견하는 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이를 양육하는 데 또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나의 느낀 바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어렸을 때의 기억에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어 부모님께 말씀드릴 때마다 아버지는 계획을 가져와보라는 답을 하셨던 것 같다. 사실 대부분 특별한 계획이 있을 리가 없는 바람이었기에 나에게 아버지의 답변은 인생의 벽처럼 남겨졌다.
나는 개그 프로를 좋아한다. 개그 프로를 보면 다양한 코너들이 방송되지만 실제로 방송되지 않는 것들이 훨씬 많다고 들었다.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시연되지만 모든 것이 관객을 넘어 시청자의 이목을 받을 수는 없기에 거르고 거른 것이 방송으로 송출된다.
출연하기만 하면 말 그대로 빵빵 터지는 개그맨들도 사실 그 아이디어를 완성해 내기까지 수많은 시도를 한다. 모르긴 몰라도 내부적으로 민망함과 무안함을 수차례 겪은 뒤에야 무대에 서는 코너가 탄생하는 것이지 않을까.
나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냥 해보는 경험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정확히 무엇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비용이 지불되어야 하는) 경험들에 있어서 나의 주도적인 선택보다는 부모님의 가이드가 주가 되었던 것 같다.
그냥의 경험이 충족되지 못한 상태로 성인이 되니,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나의 취향을 확연하게 알지 못하니 무엇을 해야 즐겁게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또한 더디다. 근본적인 것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나만의 콘텐츠를 찾아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그냥의 경험을 충분히 쌓는 것이 중요하다. 그냥의 경험은 적어도 나의 취향을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고 이것이 바탕이 되어 진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냥 궁금해서 와봤어요' 하는 표현. 들어본 적이 있거나 실제로 표현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정말 그냥 궁금한 것이 맞을까? 그냥이라는 짧은 단어 안에 당신에 대한, 그 물건에 대한, 그 장소에 대한, 무엇이 되었든 그 대상에 대한 관심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이 좋아하는 마음일 수도 있고, 구매욕일 수도 있겠고, 여하튼 어느 순간이든 내뱉어지는 그냥의 내면을 파고 들어가 보면 나의 욕망이 담겨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정말 이유 없이 하는 행동은 없다고 믿는다. 아이들의 모습에서는 더 확연하다. 아이들이야 말로 눈에 보일 정도로 목적 지향적 행동을 한다.
이제 20개월에 접어든 아들은 아직도 쪽쪽이를 떼지 못하고 있다. 너무 사랑해서 그 집착을 어떻게 끊어줄지 고민이다. 밤에 잠들기 전이면 항상 쪽쪽이를 달라고 보채기 시작한다. 아직 약도 먹어야 하고, 양치도 해야 하는데 아이의 보챔은 한 번 시작되면 급 가속된다. 그럴 때 뽀뽀해주면 주겠다고 하니 아이는 짜증을 멈추고 얼른 엄마 아빠에게 입을 맞춘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가져간다.
한 번 두 번 경험이 반복되니 이제 아이가 먼저 행동한다. 양치가 끝나면 알아서 뽀뽀를 한다. 후다닥 끝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다.
아이들의 행동에는 긍정 경험이 작동한다고 들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아이가 스스로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보고 우리 부부는 박수를 치며 격한 칭찬과 함께 좋아하는 모습을 보인적이 있다. 그 뒤로 아이는 엄마 아빠에게 자기를 보라고 한 뒤 쓰레기를 알아서 버린다.
아이의 행동을 예로 들었지만 성인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를 포함하여 내 주변에 애플 제품을 꾸준히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왜 애플만 사용하냐고 물어보면 '그냥 애플이라서'라고 답하는 경우를 자주 들었다. 욕망이다. 애플 제품들을 가지고 싶은. 그 라인업을 하나 둘 구축하는 그 욕망 말이다.
아내는 어렸을 때 경험했던 것들이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피아노 학원, 미술학원, 태권도 학원 등 그 시절 모두가 필수 코스처럼 경험했던 그것들에 대한 아내의 기억이다. 다만 하다가 그만둔 것에 대한 어머님의 반응은 불만스러운 기억이라고 회상했다. '할 거면 제대로 하지 왜 그만둬'라는 반응. 생각해보면 어머님의 반응 또한 그 당시에는 보편적인 반응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어떤 경험에 대해 '가치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것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표현처럼 '행복하고 즐거운 경험이었어'로 남으면 잘못된 것일까?
성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레퍼토리처럼 언급하는 것은 '소소한 성공'이다.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일상에 얼마나 소소한 행복이 적립되어 있느냐에 따라 나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찾는 것은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자녀가 성장하는 동안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게 해 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며칠 전, 콘텐츠 기획을 하고 강의를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친구이기에 나만의 콘텐츠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나의 고민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그 친구는 이런저런 답을 해줬지만 지금 내가 넘어서야만 하는 것은 결국 고민하지 말고 해 보는 것이었다. 그 첫 번 째 단계로, 이번 달에 전자책을 써보라는 미션을 받았다.
친구와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니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안 되었던 것이 일단 그냥 해보는 용기를 갖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안에 가득한 자의식들이 늘 망설이게 만들고 선택의 시간을 지연시켰다. 망설여 봐야, 고민해 봐야 해보지 않고는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기에 누군가 등 떠밀어 줄 때 상대의 힘을 의지하여 한 발을 내딛기로 마음먹었다.
팟캐스트의 경우는 날짜와 큰 카테고리만 정했을 뿐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말 그대로 그냥 시작해보기로 한 도전이다. 돌아오는 길에 또 많은 생각들이 악마의 속삭임처럼 피어올랐지만 이번에는 '그냥'의 칼을 뽑아 들고 모두 잘라버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 어린 시절에 그냥의 경험치가 충분히 쌓여 있었다면 나의 인생은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어쩐지 그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 취향을 보다 일찍 선명하게 알았을 테니까. 그래서 다짐해본다. 내 아이만큼은 그냥의 경험치를 할 수 있는 만큼 채워 주겠노라고.
지금이라도 느끼고 적용하려는 것이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뒤늦은 깨달음 덕분에 더 큰 의지를 불태우며 밀도 있게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 내 인생에 '전자책 쓰기'와 '팟캐스트 도전'이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퀘스트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그냥의 힘을 의지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그 힘을 삶으로 증명해 보이고 싶어졌다.
결국 믿는 대로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