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얻은 자유
유래 없는 폭우가 내렸던 여름. 그리고 세 번 째라고 기록된 태풍이 지나간 초 가을. 악천후로 인해 교통 통제 소식을 들을 때면 어김없이 드는 생각이 있다. '와,, 직장인들 빡세겠다.' 이제 퇴사 11개월 되었으려나. 불과 1년 전만 해도 남 걱정할 입장은 아니었는데.
MBTI 검사를 해보면 E로 시작하는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리고 바깥출입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육아를 하기 시작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검사에서는 E와 I가 51:49로 나왔다. 어쩐지, 사람 만나는 것만큼 집에 콕 들어박혀 글 쓰고 내 작업하는 것도 제법 재미가 있더라.
퇴사를 하고 한 동안은 마냥 즐거웠다. 당연하다. 하기 싫어도 했어야만 하는 삶의 시간이 멈춰버렸고 모든 것이 나의 선택에 따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삶의 시간이 시작되었으니 그보다 기쁠 수는 없었다. 제주로 한 달 살기도 다녀왔고, 한 겨울 추위와 매서운 눈이 날릴 때도 따뜻한 집에 앉아 넷플릭스를 보며 그저 낭만에 젖어 살 수 있었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즐거움이 지속되니 점점 호주머니 사정에 눈을 뜨게 된다. 마치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나의 현재의 모습이 직시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일상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두려움과 불안이 차지해버렸다. 각종 강의를 찾아 기웃거리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만 돌아 돌아 결국 제자리일 수밖에 없었던 건, 나는 나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일 하는 게 좋은 사람이지?
나는 혼자 일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함께 일하는 것이 좋은가?
나는 돈을 왕창 벌고 싶은 걸까? 아니면 돈은 먹고 살 정도만 있으면 되는 걸까?
...
...
...
나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올랐고 그 질문들에 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 시기가 어쩌면 나의 불안이 가장 고조되었던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한 여름의 무더위가 겹쳐 예민함이 극에 달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나는 내가 불안을 부여잡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첫 회사에 다닐 때가 문득 떠오른다. 친했던 동료와 매일 건물 중간 테라스에 나가 그렇게 회사 욕을 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어렸다. 생각이 말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회사라는 조직에서 말단 사원의 역할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닌 수용하고 해내는 것일 텐데,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결국 터져버려 퇴사를 선택한 나의 지난 시절.
어딘가에 메인 삶을 살다 보면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원래 사람이 그렇다. 주어진 것보다, 내가 가진 것보다,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삶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 더 크게 여겨지는 법이다. 오죽하면 찬송가에서도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라고 하지 않겠나 싶다.
한 바탕 불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발을 겨우 빼고 나니 이제야 알겠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나는 요즘 나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한다. '지금'을 살자.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냥'해보자. 그런데 그때의 나에게도 똑같이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직장에서 하염없이 짜증 섞인 나날을 보내던 그때의 나에게도 '그냥 해봐'라고 얘기해 줄 수 있을까.
말이야 해 줄 수 있겠지만 그때의 내가 들어먹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평일을 즐길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결국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함을 뜻한다. 직장인들에게는 자유로와 보이는 이 삶은 호주머니 사정을 매일 걱정하고 스타벅스도 어디선가 쿠폰이 날아오지 않음 쉽게 가지 못하는, 어쩌면 참 애처로워 보일 수 있는 이 삶을 감당해야 얻어지는 것이다.
처자식이 있으니 결국 내가 누리는 자유로움은 아내가 일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다소 불편한 진실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직장 말고는 돈벌이 활동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라면 더욱 자신이 뭘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시작되는 순간 겪어야 하는 마음의 파도는 때론 쓰나미처럼 나를 때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선택할 용기가 있다면 나는 감히 선택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일장 일단이 있는 것이 삶이라면, 나는 '그럼에도'의 용기와 '그냥'의 호기를 부려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흙 속에 뿌리를 내린 식물은 줄기가 타들어가고 병해를 입어도 적정선에서 잘라낼 용기만 있다면, 그리고 견뎌낼 의지만 있다면 새 줄기가 올라온다. 삶도 그렇다.
내어 던져보는 선택을 해보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 사실 몰라도 잘 살아갈 수는 있다. 그걸 굳이 알아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당장 옆사람 붙잡고 물어봐라. 당신 어떻게 살고 싶어서 지금 이 시간에 그것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질문의 시간이 좋다. '직장인'이라는 삶의 거대한 끈을 놓았더니 쏟아지는 내 안의 수많은 질문들. 나는 그 질문을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즐긴다. 그래서 견딜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은 기본값이니 거기에 너무 함몰되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 나는 근본의 질문에 답을 해 나가며 결국 도약할 나를 기대한다.
이것이 내가 직장을 포기하고 얻은 평일의 자유로운 삶이 주는 풍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