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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특별한 경험이없는 것같아요.

- 평범한 일상의 경험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자기 발견

by 알레

재미난 강의를 들었다. 기억에 대한 메커니즘을 이야기하는 강의였는데, 단기 기억은 뇌의 신경전달물질이고 장기기억은 뇌 단백질의 변화라고 한다. 즉, 장기기억은 신경전달물질이 뇌 단백질의 일부로 변한 상태이며 따라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계속 그 기억을 떠올릴수록 뇌가 바뀌게 되는데 뇌가 바뀐다는 것은 곧 기억이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강의를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과거의 나의 실패의 기억들, 민망해서 감추고 싶은 기억들을 떠올리며 그 상황 이면에 교훈들을 떠올리기에 집중해본다면 그 실패에 대한 감정이 사그라들고 오히려 좋은 동기를 부여해주는 에너지원이 되어주지 않을까?


뇌 과학이라든가 심리학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어쩐지 도움이 될 것 같아 한 번 해보기로 한다. 어떤 실패를 떠올려 볼까. 나에게 가장 뼈아픈 경험은 대학원 시절이다. 학부 과정을 마치고 나름의 포부를 안고 진학했던 대학원에서 졸업 논문을 쓰고 탈출하는 그 순간까지 고배를 연거푸 마셨던 기억이 지배적이다. 이미 목표도 상실한 채 그저 미련함으로 완주했던 정말 내 인생의 가장 처절한 순간이었다.


이 기억에서 무엇을 꺼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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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도전이다. 비록 기억 속에 대학원 시절은 나의 실패한 경험의 카테고리에 분류되어있지만 적어도 난 처절한 도전 한 번은 해본 셈이다. 원서들을 읽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페이퍼를 쓰기 위해 다양한 자료들을 탐구했다. 어설펐지만 적어도 내 이름으로 논문 한 권은 발간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는, 습성의 변화이다. 아이러니하지만 힘들게 논문을 써 나가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자료들을 살펴보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것을 배울 때 개념이 정립이 될 때까지 파고드는 습성이 생겼다. 본원적인 성향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만큼 상대적인 습성이지만 그래도 대학원의 전과 후로 나누어 보면 확실히 달라진 습성이다.


세 번째는, 성취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페이지가 넘는 - 물론 목자와 참고문헌도 다 포함해서이긴 하지만 - 책 한 권을 영어로 작성해보았다는 것은 살면서 두 번은 겪지 못할 일일 것이다. 아니 더는 겪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겠다. 어찌 되었든 노력의 결과물은 고스란히 집에 남아 성취감의 산물로 자리 잡고 있다.


네 번째는, 자기 발견이다. 부분적이긴 하지만 실패의 경험에 대한 피드백은 많은 것들을 제공해준다. 그중에 크게 깨달은 것은 나와 학자의 길은 그다지 잘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석사과정을 시작했던 이유는 국제기구에서 연구자로 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막상 겪어보니 나의 길은 아니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다섯 번째는, 성취감과 다소 맞닿아 있는 부분인 것 같은데 적어도 한 사이클을 완주했다는 경험이다. 정말 포기하고 싶던 순간이 많았다. 심지어 교수님 중에 한 분은 학생들에게 첫 학기가 끝나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학위 과정을 끝까지 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이 길이 아니면 접고 여러분의 삶을 찾아가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다." 순간순간 이 말이 떠올라 흔들린 것도 사실이지만 미련하게 달렸다. 어쩌면 마라톤에서 꼴찌를 한 셈이지만 적어도 결승선은 밟아보았다는 경험은 한 편으로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자신의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경험이 없이 살아온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말이다. 사실 나도 숱하게 이 말을 반복하며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가 평범하게 여겼던 그 시간들 속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건들이 참 많다는 것을 의지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대학원의 기억은 줄곧 실패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하나하나 뒤집어 보니 그 속에 '나'라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는 수많은 정보들이 묻혀있었던 것을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는 꼭 누군가 처럼 국토순례를, 배낭여행을, 어학연수를, 아르바이트나 창업경진대회를 경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삶도 만약 360도 카메라로 촬영한 후 돌려본다면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일 것이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삶의 시간 속에서 발견하는 나의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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