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못 올 시간. 오늘을 삽니다.
사람이 안고 사는 마음의 짐의 무게는 얼마일까? 누군가에게 베푼 선의가 결과적으로 악의가 돼버렸을 때, 선의를 베풀었던 사람은 본의 아니게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 마음의 짐은 또 대체 언제까지 가져가는 게 맞을까? 언제야 풀릴 수 있는 걸까? 만약 인생의 잘못된 선택으로 누군가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줬다면 그 짐을 언제까지 짊어지는 게 맡는 걸까?
드라마를 보다 문득 이런 생각들이 밀려온다. 이 모든 질문에 정답이 있을까는 모르겠지만 답이 없는 질문 앞에 서면 생각이 멎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가끔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 모든 게 끝나는 시점. 끝이라는 건 무엇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이상 생각의 흐름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며, 존재의 의미에 대해, 삶의 목적과 방향성 따위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 내가 몇 시에 일어났고 무엇을 했으며 어떤 감정으로 살았는지, 일상이라는 것이 더는 없다. 마치 컬러풀한 영상 어딘가부터 갑자기 온통 흑백, 완전한 흑백으로 뒤바뀌어 아무 소리도 아무 영상도 나오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그 죽음이 언제 올지 우린 아무도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
어렸을 땐 죽음이 '죽음 따위'로 여겨졌다. 그런데 지금은 나의 경솔한 생각이 스스로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민망하게 만든다. '죽음'은 '따위'로 치부될 무언가가 아니다. 생의 마지막은 경외감으로 바라봐야 할 대상이다. 시작처럼.
이쯤에서 다시 한번 묻는다. 어떤 이유로든, 상황이 어떻게 얽혀있든 살아가는 동안 우린 마음의 짐을 언제까지 지고 살아가는 게 맞는 걸까?
사실 이 질문은 정답을 내고자 함이 아니다. 각자에게 각자만의 답이 있을 것일 테니. 그보다는, 그래서 나의 오늘에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키고 싶을 뿐이다.
우린 모두 시한부나 마찬가지다. 그게 누군가는 한 달, 1년 뒤인 것이고 누군가는 그저 미정일 뿐이다. 하루를 지독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정상이고, 그냥 Que sera sera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도 또한 정상이다. 지독하니 힘 좀 빼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살아서 뭐 될래 나무랄 것도 없다. 그저 자기 삶을 살아가야 한다.
삶은 본질적으로 복잡하다. 큰 깨달음을 얻은 선인들의 삶에 대한 단순한 표현들 조차 그 복잡함의 시간을 겪은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삶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내 인생이라고 내가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되는 거다. 우리는 복잡함 속에 서로 얽혀있는 하나의 우주와 같으니.
나의 결론은, 마음의 짐은 적당한 선에서 적절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평생 움켜쥐고 산다고 답이 나오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고서야 도리어 움켜쥔 내 마음을 괴롭게 만드는 일이 돼버릴 테니. 삶은 드라마의 잘 짜인 각본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때론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틱한 게 인생이지 않던가.
좀 개똥철학 같은 소리를 나불거렸지만,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삶의 방향을 잃었거나 찾고 있는 중이라면 끝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삶을 끝으로부터 역산하면 지금 해야 할 행동에 답을 낼 수 있다. 단, 끝이 한 가지 결론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살다 보면 그게 바뀌어 버릴 수도 있으니.
그러니 그저 오늘에 충실하자. 내일일은 내일 염려 가자. 한낱 괴로움은 그날에 족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