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과 소통하고 있는 게 맞나요?
현시대의 소통은 그 어느 때보다 빨라졌고 편리해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핸드폰이 없어 삐삐로 소통하던 시절, 전호 사서함을 이용하던 시절, 공중전화를 이용하던 시절, 파발을 띄우던 시절, 전서구를 날리던 시절 등 과거로 거슬러 갈수록 문명의 이기로 인한 편리함은 정말 천지개벽이 몇 번이고 일어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카카오톡 감옥이라고 표현될 만큼 너무 많은 소통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어 오히려 어디에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되거나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스몰 토크와 같은 대화로 낭비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소통이 편리해진 현시대에, 우리는 과연 마음의 소통을 나누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상을 살다 보면 가끔, 아니 생각보다 자주 외롭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사람이 고픈 감정 상태에 빠질 때가 있는데, 물론 육아라는 특수한 상황이 가장 주된 원인이긴 하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몇 안 되는 인원이었어도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오히려 필요 외로 깊어지는 듯 한 관계로 인해 피로감이 느껴질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정 반대다. 지금은 참 사람이 고프다.
아무래도 나는 사람을 워낙 좋아하는 성격이라 더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일정 부분 갈증을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커뮤니티 활동을 하다 보면 또 느껴지는 것이 있다. 하루에도 수백 건이 넘는 대화가 오가는 소리 없는 소란스러움 가운데도 여전히 채워짐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헛헛함은 여전하다. 역시 사람과 사람은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에게 시선을 교차할 때 비로소 마음이 통하는 법인 것 같다. 물론 내가 요즘 세대는 아니니 관계를 맺는 방식 자체가 아날로그적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식구라는 말이 함께 밥을 먹는 입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마음을 통하는 사이가 되려면 역시 식사라도 함께 나누는 게 필요한 것 같다. 하다못해 차 한 잔이라도.
최근 며칠간 만남의 약속이 연달아 있었다. 덕분에 밖에 나가 커피 한 잔 하며 두세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오랜만에 마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경우이든 상관없이 즐거웠다. 얼굴을 마주하고 비언어적인 대화가 함께 섞인 그 나눔. 오랜만에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음이, 그리고 시선과 음성이, 그리고 공간이 주는 감성이 말이다.
서로 소통한다는 말은 막힘없이 잘 통한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막힘없이 잘 통하기 위해선 순간의 반응을 계속 읽어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의 호흡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암묵적인 리듬 규칙에 따라 흘러가야 자연스럽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이면 소통이라 할 수 없다. 수시로 흐름이 끊기거나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것도 원활한 소통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마음으로 통해야 하는 것이다.
온라인상의 화상 미팅이 많은 공간적 제약을 해소시켜 준 것은 맞다. 그러나 나에겐 여전히 이 공간은 낯설다. 평소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공간에서만은 대체로 침묵을 지킨다. 암묵적인 리듬 규칙을 따라가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소통이 편리해진 요즘. 나는 누구와 마음으로 통하고 있나. 문득 고민해 보게 된다. 마음으로 통한다 여긴 그 상대방은 나와 같은 마음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점점 피상적인 관계가 켜켜이 쌓여가는 이 시대에, 소통은 과연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 것일까. 의문만 가득 남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