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가치 재평가가 필요한 시기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면 나는 뭐라고 답할까. 잠시 생각해 보니 실제로도 이렇게 답했던 것 같다. '당신이 왜 재능이 없어요? 지금 누구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빠르고 더 익숙하게 해내는 그것들이 곧 당신의 재능이에요!' 근데 정작 나 자신에게는 왜 이런 말을 망설이는 걸까.
요즘 나는 다른 때보다 더 집중적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중이다. 그 일환으로 아주 사소한 기억들을 떠올려보았다. 나를 오래 본 사람들이 했던 말. 대체로 기억나지 않는 일상의 사사로운 수다 중에서 그래도 기억에 남았던 반복적인 표현이 하나 떠올랐다. 나는 빠르게 카피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아마 오래된 친구들과의 모임에 그런 사람 한 명은 있을 것이다. 친구들의 특징적인 부분을 묘하게 잘 흉내 내는 사람. 똑같진 않지만 그 대상을 아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를 잘 살려내는 사람.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소리다. 아, 물론 이건 나의 표현이 아닌 나를 오래 본 사람들이 나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럼 이게 어떤 의미일까? 차분히 생각을 곱씹어 보았다. 그렇다고 희극인들처럼 수준급의 묘사를 하는 사람은 또 아니고, 남을 흉내 내는 것에는 어떤 숨겨진 의미가 있는 걸까. 삶이라는 시간을 훑으며 그 안에 배어있는 나의 행동들을 펼쳐 보니 보이는 키워드가 있었다. '관찰', '감각', '빠른 응용', '습득'. 일단 이 정도가 떠올랐다.
누군가의 특징을 빠르게 찾아낸다는 것은 관찰력이 좋다는 것이고, 그것을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응용력과 감각이 좋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을 좀 더 확장시켜 생각해 보자. 흉내내기는 꼭 행동이나 표정, 성대모사와 같은 소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간단한 영상 작업을 하는 것,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 글쓰기를 할 때 표현하는 방식, 말하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 일하는 방식 등 다양한 것에 적용될 수 있다.
다시 나의 과거를 꺼내보면 기억 속에 또 한 가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중학생 때만 해도 수학을 잘했기에 고1 때 공통수학을 만만하게 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난 결국 수포자가 되었다. 수능은 봐야겠고, 원하는 대학은 있었기에 수학 성적을 끌어올리는 게 최대 관문이었다. 그래서 난 반장 옆에 딱 붙어 앉아 그 친구가 문제 풀이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 했다. 결과는 대 성공.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친구를 좀 귀찮게 하긴 했지만, 그 친구의 방식을 빠르게 습득하고 응용할 수 있었던 덕분에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럼 이쯤에서 다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여전히 나는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자문자답이지만 왜 일어나는 마음의 부담은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받을 때와 동일할까. 왜 속 시원히 아니라고 답하지 못할까. 결국 나의 기준이 '재능 = 돈 버는 기술'이라고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는 '재능'이 모두 '잔재주' 또는 '별것 아닌 것' 정도로 치부되는 것이다.
결국 지금 나에게 필요한 단계는 두 가지다. 잔재주 정도로 생각하는 것으로 돈을 벌어보던가, 아니면 스스로 재능이라 여길 만큼 기술을 연마하던가.
퇴사 후의 삶에서 가장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나는 쓸모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직장에서 내가 할 줄 아는 것들이 직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서도 유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을 유용한 것으로 꿰어내지 못했고 그 시간이 길어지니 자기 효용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지금의 나는 나의 시간을 재해석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듯한 시간을 지나니 좀 더 나를 면밀히 들여다보게 된다. 지금까지 그런 시간을 가져왔지만 좀 더 심화된 시간이라고 느껴진다. 모든 것들에 의미를 재해석하게 되고, 재해석된 것들로 나를 재정의해보는 시간. 지금 나는 그렇게 무르익어 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나를 신경 써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곁에 있음에 감사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의 모습은 9 to 6의 삶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한다면 한 발 뒤로 물러설 순 있지만 결국 난 이 고민의 결론을 내고 나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애초에 마음먹었던 것처럼, 내 아이에게 삶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으니까.
생각을 달리하자. 내가 할 줄 아는 것.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나의 것들은 당연한 게 아니다. 그것은 분명 재능이고 연마되면 빛나는 보석이 될 것들이라는 사실을 믿어주자. 결국 삶은 원하는 곳으로 나를 이끌어갈 것이다. 나는 결국 '나'라는 벽을 넘어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