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지만 아빠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그날 아이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은 채 분주했다.

by 알레

하루에 인간의 시신경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어느 정도 일까? 한 컷 한 컷 나눠보면 아마 수백만 컷, 아니 수천만 컷, 어쩌면 그 이상이지 않을까 싶다. 매일의 일상에는 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중에 단기 기억에 저장되는 것들은 정말 선택받은 장면들일 것이다. 그 단기 기억 중에 장기기억으로 남는 것은 간택을 넘어 승은을 입은 기억들인 셈이다. 물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아이를 키우다 보면 태어났을 때의 감격스러운 장면부터 하루 이틀, 매일 조금씩 커가는 아이의 모습에 감동하며 보낸 나날이 쌓인다. 처음엔 이 순간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싶지만 감동이 매일 반복되니 그 또한 일상이 되고, 일상이 되었다는 건 더 이상 그만큼의 감동을 받지는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장기기억 간택 기준이 높아진다.


매일이 감동이고 즐거움이며 행복인 건 맞지만 그러한 순간이 항상 남아있지는 않는 게 일상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유난히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떠올리면 괜스레 코 끝이 찡해지는 장면. 그때 아이의 눈동자가 내겐 유독 잊히지 않는다. 미안한 마음과 함께.


처음은 누구나 서툴다. 아빠가 된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오냐오냐 다 받아주며 놀아주는 건 이모, 삼촌,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할이고. 엄마와 아빠는 마냥 그럴 수만은 없다. 육아가 참 어려운 건 어디까지 놓아야 하고 어디서부터 잡아야 하는지를 내가 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긴 시간이 시행착오에 완충 작용을 해주긴 하지만 아이의 심리에 혹 부정적 밑그림을 그리는 건 아닐까 고민도 많아진다.


사람들은 화를 내되 감정을 섞지 말라고 한다. 즉, 잘못된 점은 명확하게 지적하되 거기에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도 안다. 그건 비단 애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니까. 근데 그게 어디 쉬운가. 화를 내면 감정이 섞인다. 반대로 웃으면 행복감이 피어나듯 화는 짜증이 스민다. 그러니 그걸 구분하라고 말하는 건 이미 다 지나간 자의 훈수같이 느껴질 때가 많은 것이다. 어쨌든.


기억 속의 그날은 유난히 감정이 섞였던 것 같다. 아이의 자아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부딪히는 상황도 하나 둘, 늘어났다. 안된다는 말을, 부정어 표현을 자제하고 싶지만 아마도 나의 침체기가 더해 표현이 세게 나갔나 보다. 윽박지르는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이의 눈동자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분주했다. 그러면서도 아빠를 바라봤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있다. 아이들에게 화를 낼 때 아이가 웃으면서 딴청을 피우는 건 그 상황이 아이에게는 너무나 어색해서 피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거라고. 그날 내 아이도 그랬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함께 웃음을 지었다 무서워했다 울먹이던 표정이 마치 버퍼링에 걸린 듯했으니. 결국 울음이 터지며 엄마에게 안겼지만.


이미 수개월 전의 일이다. 근데 나에겐 이 장면이 기억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럴 때면 미안한 마음과 견디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한탄이 동시에 밀려온다. '혹 아이의 마음속에도 그날의 기억이 남아있음 어떡하지?', '혹 아이가 눈을 마주치는 걸 어려워하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이 자꾸 자책하게 만든다. 사실 이 또한 떨쳐 버려야 할 마음일 텐데.


33개월 아들은 요즘따라 자기 혼자 있겠다는 표현을 자주 한다. 독립심이 아니라 반항심이다. 자기의 행동을 제제하려는 엄마와 아빠에게 하는 표현이니. 그렇다고 혼자 있으라고 하면 또 싫다고 한다. 거실에 혼자 두고 방에 들어가면 이내 눈치를 살피며 방에 들어온다. 귀여운 녀석. 태어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만큼 컸다.


앞으로 얼마나 더 거친 순간들이 있을까. 내심 두렵기도 하고 또 그래서 더 나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감정이 섞이지 않은 올바른 훈육을 하는 게 부모의 몫이니 그러려면 먼저 내가 안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매일 글을 쓰게 된다. 글 쓰는 시간은 내 마음의 눈을 마주 보는 시간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