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은 구공탄에 끓여야 제맛이랬나. 후루룹 짭짭 후루룹 짭짭 맛 좋은 라면 이랬던 가. 아이공룡 둘리에 나오던 마이콜이 부른 노래의 가사가 문득 떠오르는 밤이다. 오늘 글루틴의 글감은 '라면'이다. 함께 글을 쓰는 작가님들의 글을 읽고 있노라니 점점 군침이 돌아 이젠 침샘이 구멍 난 듯 착각할 정도다. 자정이 다가오는 지금 라면을 끓여 말어의 선택의 귀로에 서 버렸다. 하아. 내가 놓은 덫에 내가 걸려버렸다.
작가님들의 글을 읽다 보니 문득 우리네 삶에 라면과 얽힌 이야기들이 참 많은 것 같다. 라면을 박스로 들여놓고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 해외에서 유통되는 우리나라 라면 이야기, 식재료가 다르니 현지에서 공수한 재료들을 추가해 끓어 먹었다는 이야기, 조카들이 좋아해서 맛있게 끓여준 이야기,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라멘집 이야기. 등.
라면이 꼬불꼬불 한 건 각자의 삶이 라면에 한데 엉켜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에게 떠오르는 라면의 추억은 무엇이 있을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기억은 고교시절 친구와 부린 객기다. 지금은 절대 하지 못할 짓이지만 그 시절 한참 식욕이 왕성하던 10대 청소년에게 라면 5개가 대수랴. 친구랑 둘이 10개를 끓여 각 5개씩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그땐 그래도 배부른 줄 몰랐.... 다.
더 과거의 기억은, 초등학생 때다. 그땐 라면은 아버지만의 특별식인 듯했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단.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이런 거 먹으면 안 돼." 안다. 그냥 잠자고 있는 '라면 미각'을 깨우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한 번 발을 들이면 더 이상 아버지만의 특별식으로 남을 수 없을 테니.
또 하나의 기억은, 컵라면에 대한 기억이다. 역시 초등학생 시절. 사실 라면이 뭐 건강한 음식이라고, 그걸 한 번에 여러 개 먹는 게 건강에 좋을 리 없다는 건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친구는 컵라면 두 개를 먹는데 나만 한 개로 제재를 당하는 건 좀 억울하지 않겠나. 한 번은 태권도 품증 심사를 보러 간 날, 국기원 앞에 천막을 치고 라면을 나눠 주던 어머님들이 계셨는데, 그날 난 소원을 이뤘다. 컵라면 두 개를 연달아 해치웠다! 유후!
고등학생 때, 매주 토요일 저녁때 교회에서 청소년 예배가 있었는데, 끝나고 나면 교외에서 라면을 끓여 주셨다. 예배팀 분들과 섞여 앉아 라면을 먹으며 배가 든든한 상태로 교제를 나눴던 기억도 잊지 못할 기억이다. 그리고 그때 처음 알았다. 역시 라면은 불 세기가 중요하다는 걸! 교회 주방 화구는 음식점 화구와 같았으니 일반 가정보다 센 불로 라면을 끓일 수 있었다. 맛에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대학생 때로 넘어오면, 라면은 겨우살이를 하던 나에게 일용할 양식이었다. 뭔 일이 있었냐면, 당시에 사고 싶었던 악기가 하나 있었다. 얼핏 기억에 대략 60만 원 정도 했던 것 같다. 용돈을 모아야 하는 상황이니, 지출을 최대한 아낄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식 라면은 12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루에 이거 한 끼만 먹고 버텼다. 오죽했으면 가끔 동기들이 밥을 사줬겠다. 결국 난 원하던 악기를 샀다. 물론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잊지 못할 가장 맛있었던 라면은 아마 아내와 서울을 떠나 울진에서 1년 살기를 할 때 먹은 라면일 것 같다. 울진은 대게로 유명한 고장인 만큼 어시장 상인과 조금만 면을 터놓으면 오다가다 얼려놓은 파지를 얻을 수 있다. 냉동실에 넣어둔 홍게를 꺼내 육수를 내고 라면을 끓였다. 미. 쳐. 다! 와우. 이건 정말 저세상 맛이었다.
라면을 끓이는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정석대로 끓이는 사람. 계란을 넣는데 풀어 넣는 사람 또는 수란처럼 노른자를 터뜨리지 않는 사람. 마지막에 파채를 때려 넣는 사람. 면을 튀긴 기름이 싫다고 먼저 면을 삶고 담백하게 끓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 수프가 건강에 좋지 않다고 각종 야채를 넣어 먹는 사람. 콩나물을 넣어 시원한 맛을 즐기는 사람. 고추기름을 내고 끓인 물에 청양고추까지 더해 매콤함을 극대화시키는 사람. 면을 삶을 때 면을 들어 올렸다 내리며 공기와 맞닿게 해야 더 쫄깃해진다는 사람. 등.
이제 이만하면 뭐 더 말해 뭐 할까 싶다. 라면은 김치와 더불어 한국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음식이면서 소중한 추억인듯하다. 호로록 면을 빨아들이며 끊이지 않도록 면치기를 하는 손도 이젠 우리들만의 고유의 문화처럼 느껴진다. 날이 선선해지니 뜨끈하고 얼큰한 라면 한 사발이 떠오른다. 이제는 보기 힘든 길거리 포장마차에 앉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따뜻함을 느끼던 그날이 그리워지는 밤이다.
하아, 진심 먹고 싶어 진다. 끓여? 말어?
이 밤에 라면을 먹느냐 마느냐가 사느냐 죽느냐 보다 더 심각한 문제일 줄야. 글을 더 썼다간 진짜 먹게 될 것 같아서 그만 써야겠다. '라면'은 실로 무서운 글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