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친다.
'지나간 시간은 늘 짧게 느껴지고 지나갈 시간은 언제나 멀기만 하다.'
아이가 곧 36개월 차에 접어든다. 태어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 돌이 코 앞이다. 세 돌을 코 앞에 둔 지금, 우리 집에는 매일 아침 그분이 오신다. 이름하여 '아니야!'
늦게 잠드는 아이는 늘 아침잠이 많다. 깨우기 민망할 정도로 곤히 잠들어있다. 억지로 깨울 때면 늘 '아니야! 깨우지 마!'와 한참 씨름을 한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 아빠 하지 마, 아빠 저리 가, 친구 밀거야, 울 거야, 옷 안 갈아입을 거야, 등. 매일 아침 대화로는 타협점을 찾기 어려운 고집쟁이 그 분과 한바탕 난리를 피운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아이가 좋아하는 약간 불량스러운 느낌의 먹을거리를 제시하면 어느새 순종적인 아이로 돌아온다.
일주일에 하루 아내가 출근할 때가 그나마 9시 전에 등원하는 날이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없어졌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출근을 하니 아내의 출근 시간이 자꾸 늦어져 회사에 눈치를 보는 상황이 발생해 버린 탓이다. 이제는 아내가 먼저 출발하고 아이의 등원은 내가 맡게 되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엄마가 없으면 아니야에 하나가 추가된다. 슬퍼.
무슨 캐치티니핑도 아니고. 마치 아니야핑, 슬퍼핑의 마법에 걸린 듯 매일 아침 아이는 나에게 도전 과제를 내어주는 것 같다. 주로 빡침의 에너지이긴 하지만,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고 난 아침은 마치 5km 걷기를 하고 돌아온 상태처럼 에너지가 역동적으로 흐른다. 이렇게 표현하니 뭐 또 그리 나빠 보이지만은 않은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온갖 투정을 부리던 아이에게 긍정의 행동을 촉발시킬 그 마법의 먹을거리 덕분에 어쨌든 결과는 좋은 아침이다.
요즘 아내랑 자주 나누는 대화가 있다. '우리 아들이 언제 이렇게 컸나' 하는 것. 찰나처럼 느껴지는 지난 시간 아이 덕분에 참 많이 웃고 결국은 행복했다. 아이 때문에 폭발했던 나 자신을 성찰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잘 되길 간절히 바라는 건 아이를 품을 수 있는 나의 그릇을 더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바람은 한결같다. 나는 삶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다. 아이에게 그런 아빠이길 바란다. 돌아보면 찰나 같은 시간에 딱 떠오르는 감정이 늘 행복이길 바란다. 그래서 난 내일도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함께 쌓아갈 매일이 늘 최소의 날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