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삶의 방향을 묻는 말은 언제나 답하기가 버겁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단순하고 복잡해지려면 또 한없이 복잡해지는 게 사람이 삶이기에 무수한 날 동안 같은 질문을 던져봤지만, 내어놓는 답은 그때그때 다르다. 누군가는 말하길, 원래 삶의 방향은 매일 찍어대는 점의 위치가 다르기에 일직선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그래서 중요한 건 방향성이라고.
이 말이 와닿는 건 내 안에 욕망이 한 가지가 아니기에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자극이 달라질 경우 바라는 삶의 모습도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향을 인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런데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경향을 인지하는 것도 절대 쉽지 않다.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매번 같은 질문 앞에 설 때면 '이거!'라고 답이 딱 부러지게 나오지 않는다.
요즈음 들었던 생각이 하나 있다. '과연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나는 지금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나?' 하는 것이었다. 친한 지인 중에 각자의 영역에서 영향력을 나누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과 처음 만났을 땐 나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고민을 품고 있었기에 동질감이 느껴졌다. 누구보다 애쓰며 살아가는 각자의 삶을 응원했다.
시간이 지나 오늘에 이르니 우리의 모습은 너무 많은 간극이 생겨버렸다. 저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달려 나가는 중이고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연스레 소통의 횟수도 줄어들었다. 관계의 소원해짐이라기보단 삶의 밀도가 달라졌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때는 언제든 편하게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한 번의 만남을 위해선 길게 줄을 서야만 하는 명품 매장처럼 기다림이 당연해졌다.
같은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제자리이고 그들은 멀어진 현실이 나를 수시로 찔러댔다. 순간 열등감이 생기면 부정적인 생각이 곰팡이가 퍼지듯 재빠르게 확산하여 머릿속부터 마음마저 점령했다. 털어내려고 애쓰지만 어쨌든 다 털어낼 때까지는 감당해야 하기에 괴롭기만 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불쑥 찾아오는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오늘의 나이기에 '원하는 삶'에 대한 질문이 버겁기만 했다.
간극을 바라보며 살아오던 나는 내일을 생각하기보단 지난날을 반추하기 바빴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답을 주고 있었다. 나를 열등한 존재로 만들었던 그들의 삶, 나의 욕구는 거기에 있었다. 내가 열망하는 삶의 모습은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같은 선상에 있던 사람들이 먼저 그 길을 걷고 있음이 조급하게 만들었다. 나의 솔직한 욕구를 이해하고 나니 부러움과 질투로 가득해 쪼그라들게 했던 못난 마음이 모두 사라졌다.
사실 나는 내가 그들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이 절대 나와 같은 선상이 아님을 잘 안다. 이전에 그들이 쌓아 올린 시간, 감당해야만 했던 시행착오들, 낙담의 순간들은 훨씬 오래였다. 그 시간을 견뎠기에 단단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에게 영향력을 나누며 살아가는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감사하다. 내가 바라는 그 길을 먼저 걸어간 그들이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삶의 모습이기에 너무 명료하다. 그들이 묵묵히 견뎌낸 시간을 알기에 때론 의구심이 들더라도 내 길이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안다.
나는 매일 글을 쓰며 그들이 발자취를 따라가는 중이다. 그리고 나의 글은 발자취가 되어, 또 다른 누군가를 안내해 줄 수 있는 이정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오늘, 지금, 이 순간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원하는 삶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