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과 연결의 시간
'퇴사'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어떤 감정이 밀려오는가? 혹 회사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먼저 치솟아 오르는가? 아니면 주체적인 앞날을 위해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떠나는 탐험가 같은 모습이 그려지는가?
*퇴사(退社)
1. 회사에서 퇴근함.
2. 회사를 그만두고 물러남.
- 네이버 어학사전 참조
사실 단어에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전 상의 뜻만 보면 그 의미는 참 담백할 정도다.
그런 단어에 우리는 정말 많은 감정을 이입시킨다. 상황에 대한 이해와 몰이해, 부러움과 분노 등. 그리고 퇴사의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그런데 결국 다 가지를 쳐내고 나면 남는 건 그냥 '나는 퇴사를 선택했다' 또는 '나는 퇴사해야겠다는 마음을, 상황을 받아들였다' 정도로 함축할 수 있을 것 같다.
퇴사학 개론.
'개론'이라 하면 어떤 것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나의 퇴사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만큼 포괄할 수 있는 범위도 매우 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글의 타이틀에 거창하게 '개론'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여보았다.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저 퇴사에 대해 내 나름 재정의해보기 위해 고루한 이름을 다시 꺼내보기로 했다. 퇴사라는 결과는 모두 같을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은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나의 개론에 또 누군가의 개론을 더하고 그렇게 계속 더 해나가다 보면 그것은 진짜 개론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혹시 모를 누군가가 이 글을 주어다가 또 살을 붙여나갈지도 모르겠다는 꿈같은 기대를 품고 이 글을 툭- 던져보기로 했다.
그동안 회사 차원에서 퇴사의 의미를 더 많이 언급했던 것 같다.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무엇인가를 탓하고 외부 로부터 이유를 찾는 것은 가장 첫 번째 단계이고 쉬운 접근 방법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가 굳이 동의를 구해야 할 나의 주변 세계에도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준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그 판을 만들어왔던 것인 줄도 모르겠다.
회사가 이러네, 조직이 엉망이네, 관리자가 무능하네, 사장님이 문제네, 갑자기 등장하여 난리 치는 사장님 일가친지들이 잘못했네 하면서 가장 쉬운 이유를 부지기수로 늘어놓기에 바빴다. 물론 언제나 외부 세계에서만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내 안에서 그 이유를 찾기 위한 시간 또한 오랜 시간 가져왔다.
최근 들어 퇴사의 의미를 두 가지로 재 정의해보았다.
첫째는 단절이고,
둘째는 연결이다.
가장 첫째로 퇴사는 반복적으로 지나온 시간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5년이라는 근속기간의 종지부를 찍는 시간인만큼 막상 끝이 다가오는 시간에 어딘가 아련함도 올라온다. 그렇게 떠나고 싶다고 외쳤으면서 또 한 편으로는 먹먹함도 있는 걸 보니 지난날의 애정은 이제 애증의 감정으로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또 다른 것은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회사라는 공간을 떠나게 됨으로써 그 안에서 맺어졌던 관계들하고도 하나 둘 정리하게 된다. 이럴 때면 사람과 사람 사이가 참 쉽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5년을 그렇게 부대끼며 보낸 사이지만 떠나면 잊히는 건 한 순간이다.
세 번째로는 나의 커리어와의 단절이다. 물론 같은 직군으로 경력 이직을 하는 경우에는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과감하게 이제껏 이어오던 커리어와 의도적인 단절을 단행하려 한다. 쉬운 결정은 아니지만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를 고민하면서 어렵게 결심했다.
네 번째는 고정 수입과의 단절이다. 어찌 보면 이 부분 때문에 퇴사를 가장 망설이게 되기도 한다. 먹고사는 문제는 언제나 가장 치명적인 포인트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육아 중인 나의 경우에는 더욱 고민이 되었다. 당장 몇 개월은 퇴직금과 실업 급여로 버틴다고 하지만 결국 나의 발목을 잡을 부분이 될 것이기에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다섯 번째는 일상의 소비생활과의 단절이다. 네 번째 이유의 결과이기도 한 소비생활의 변화는 때로는 괴롭기까지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필연적 결과이기에 그저 인내해야 할 뿐이다.
이와 같이 퇴사는 다섯 가지 단절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느 것 하나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만큼 익숙함을 벗어난다는 것은 언제나 그 자체로 또 다른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퇴사의 또 다른 의미인 연결은 어떤 것을 뜻할까?
기존 세계와의 단절은 곧 새로운 세계와 연결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매일 습관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정신을 추스른 후 회사로 향하던 삶에서 이제는 내가 나의 시간을 만들어가야 한다. 하루의 가장 긴 시간의 공백이 생기면서 나는 그 시간을 새로운 것들로 채울 준비를 하고 있다.
두 번째는 나 자신이 브랜드가 되어 외부세계와 다시 연결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장인일 때는 그 회사의 이름과 나의 직급을 레버리지 삼아 쉽게 접근했던 세계를 이제는 오롯이 나의 힘으로 문을 두드려야 한다. 아무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래서 더 기대된다. 나의 손을 잡아줄 누군가를 기대하게 된다.
가장 설레는 세 번째 연결은 지금까지 내가 스스로 막아서던 것들과 연결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를 들먹이며 이것도 저것도 안된다고 나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령 직장인이기 때문에 평일 낮 시간에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도, 서울 나들이를 가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게 된다. 그만큼 나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어떠한 시간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삶의 주도권이 이제는 회사가 아닌 나에게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네 번째 연결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연결은 같은 고민을 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의 연결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퇴사를 고민한다. 그러나 실천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을 망설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인생이 걸린 문제인 만큼 선택은 쉽지 않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래서 그런 이들과의 연결은 언제나 의미가 있다.
나의 고민의 과정을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이들도 용기 내거나 아니면 잠시 더 보류하거나 선택하는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뭐라고 퇴사학 개론이라는 말을 운운하며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기록하고 싶었고 나누고 싶었다. 요즘 매일 퇴사에 대해 새로운 생각들을 정리하게 된다.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은 내용을 토대로 나의 생각을 넓혀가고 있다.
조금이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기록을 남기고 싶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글이 어떤 짤막한 가이드가 되어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에게 퇴사는 분주하던 일상에 의도적인 틈을 만드는 선택이다. 그 틈을 얼마나 오래 가져갈지, 또 어떤 것들로 채워갈지는 나의 몫이다. 사실 어찌 보면 굳이 퇴사를 하지 않고도 이런 틈을 만들어 갈 수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퇴사를 결정했다면 적어도 불안감이 나의 공백을 가득 채우지 않도록 잘 준비해야만 한다.
앞으로 이 글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게 될 수도 있다. 지금은 다섯 가지 이유만 기록하였지만 또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된다면 그 의미는 10가지가 될 수도 있고 20가지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꼭 이야기하고 싶다. 당신 자신만의 이유를 덧붙여 나가길 바란다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 내면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유여야 한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고 계속 불확실성을 즐길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