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는 정의를 알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빅데이터
“우리는 빅데이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해외의 거대 기업인 G사에서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을 임직원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해서! 우리도 빅데이터를 활용한 전략적 사업 방안을 찾아내야 합니다!”
첫 직장을 다니던 무렵, 대표이사님은 당시 핫한 키워드였던 '빅데이터'에 꽂히셨다. 언제나 전 직원을 상대로 말씀을 하실 때면 - 전무님이 한 번 말씀을 시작하시면 기본 3시간 훈화 말씀 수준이었다 - 내내 빅데이터를 연거푸 말씀하셨다.
‘대체 빅데이터가 뭔데?’
화장실도 참아가며 자리를 지켜야 했던 직원들의 머릿속은 모두 물음표가 난무했다.
더 웃긴 건 그다음부터다. 이미 전무님의 입에서 던져진 이 어마 무시한 키워드는 본부장님, 팀장님들의 입에 거의 매일같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빅데이터를 만들어야 한다니까!’
‘우리 회사도 전략적으로 빅데이터를 수집해야 해’
‘야 영업팀! 자료들 다 취합해서 보고해!’
...
...
그야말로 ‘빅데이터’ 대환장 파티 수준이었다.
솔직히 이 분들은 빅데이터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셨던 것일까?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아니 거의 확신하건대 그냥 방대한 엑셀 자료를 모으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데이터를 어떻게 어떤 조합으로 가공하여 유효한 정보로 만들어 낼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재직 중일 때 그 단계의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그냥 애먼 말단 직원들은 평소 수집하지 않던 숫자들마저도 열심히 엑셀 시트에 긁어모으고 있었을 뿐이었다.
브랜딩
‘1차 산업에 머물러 있는 화훼농가들의 브랜딩을 통한 수익 증대‘
‘원예 농가와 함께 윈-윈 하는 기업’
현 회사에서 5년 동안 참 자주 들었던 말이다. 그러나 실상은?
지금은 바야흐로 브랜딩의 시대이다. 기업들뿐만 아니라 개개인들도 퍼스널 브랜딩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많은 자원을 투자한다. 나 역시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가 퍼스널 브랜딩이기도 하다.
일전에 마케터 융님의 온라인 강연에 의하면 브랜딩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00이라고 불러주는 것'이다.
직장에서 업무 회의 때 사용되는 브랜딩이라는 키워드는 어딘가 전문성이 있어 보이게 만들어 주고 또 마치 액티브하게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느낌을 주는 듯하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난 혼자 이런 의문이 들었다.
‘대체, 브랜딩의 정의는 알고 이야기들을 하시는 건가요?’
브랜딩이 되려면 적어도 먼저 우리가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브랜드가 되어 있는 건가? 사장님이, 그리고 직원들이 회의 때마다 즐겨찾기처럼 꺼내 사용하는 브랜드라는 용어에 대해 우리 내부적인 공동의 정의가 세워져 있는가?
난 여전히 의문 투성이다.
플랫폼 비즈니스
새벽 배송이라는 콘셉트로 마켓 컬리가 일약 스타가 되어버렸던 때 사장님의 키워드는 플랫폼이었다. 그렇다. 이번엔 플랫폼이다. 그냥 키워드만 달라졌을 뿐.
회사에서 신규 사업을 론칭하겠다고 몇 달 동안 야근에 야근을 거듭하던 시기가 있었다. 다행히 난 그 팀에 합류하지 않았기에 곁다리로 어떤 내용이 진행되고 있나 들어보았을 뿐이다. 신규 사업의 이름에는 역시 '플랫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이제 더 이상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결과적으로 그냥 그 단어에 꽂혔던 것뿐이다. 플랫폼 사업의 사례를 분석하거나 우리만의 내부 정의는 없었다.
몇 달 간의 마라톤 회의에 참석했던 직원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사업의 정의가 뭐예요?’
‘.......(하아).......이름만 몇 달 논의했어요.......’
아마 각 업종마다 직무마다 직원들의 가슴에는 내뱉고 싶은 말들이 한 트럭은 되지 않을까 싶다. 빅데이터든, 브랜딩이든, 플랫폼 비즈니스든 간에 제발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뭐라고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알고 사용하시길 부탁드리고 싶다.
그리고 대표님이 내뱉은 말이라고 무조건 모든 보고서에, 모든 대화에 그 단어가 난무하는 것은 진심으로 더는 보고 싶지 않다. 다들 아는 척,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정작 설명은 장황하다. 여전히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에둘러 설명하고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개념이 정립된 것이 아니다.
조금만 검색해보면 트렌디한 키워드들의 단어적 정의뿐만 아니라 실무 활용에 대한 좋은 예도 찾아볼 수 있다. 양심적으로 여기까지는 노력하고 회의를 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니 사장님, 부장님, 팀장님, 제발 그만 좀 꽂히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