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재능에 대해
'단 한 명이라도 인정해 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당신에게는 어떤 재능이 있습니까?
재능에 대한 이야기는 꺼낼 때마다 어렵다. 어떤 날엔 '우린 재능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에요! 남들과 비교하지 마세요!'라고 외치다가 또 어떤 날에는 '글쎄요, 저에겐 어떤 재능이 있는지, 말씀하시는 그것이 재능인지는 모르겠네요.'라며 의기소침해진다. 그래서 그냥 서두에 재능에 대한 정의를 박아두고 글을 시작해 본다. 이 정도면 누구라도 마음 편하게 자신의 재능을 꺼내 놓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헷갈렸던 것들을 재능으로 바라봐 줄 수 있지 않을까?
집에서 아이의 여러 가지 행동을 유심히 바라볼 때가 많은데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말을 배우는 모습이다. 내 아이는 유독 엄마 아빠의 입을 유심히 바라본다. 노래를 부를 때, 처음 듣는 단어를 말할 때 아이의 시선은 언제나 입에 닿아있다. 생각해 보니 외국어를 배울 때 내가 그랬다는 것이 떠올랐다.
입 모양에 따라 발음의 정확도와 전달력이 달라짐을 느끼고 입을 얼마나 벌리는지, 그리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동시에 관찰했다. 이런 습관은 비단 언어를 배울 때뿐만이 아니었다. 운동을 할 때면 어떤 작동 원리에 의해 그 자세가 나오는지, 완성된 자세로 향하는 과정과 감각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려나 싶었는데, 언젠가 아내가 아이를 보며 그랬다. '아빠를 닮아서 참 흉내도 잘 내는 것 같아.'라고. 인정해 주는 단 한 명. 그 한 명이 아내라면, 누구보다 강력한 이유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확증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감각'의 영역은 언제나 모호함을 곁들인다. 과연 나에게 있는 이 감각이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늘 존재했다. 그래서 예술 분야에 몸 담고 있지 않으면 감각의 영역은 재능이 아니라고 여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참 잘못생각하고 살았음을 깨닫는다. 대체 감각이 작동하지 않는 삶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름다운 색의 조화를 느낄 수 있는 것,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 스타일의 변화를 느끼는 것, 맛집을 알아보는 것, 아주 조금 삐뚤어진 액자를 보고 불편함을 느끼는 감각 등 삶의 전반에 유용하게 쓰이는 감각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보면 소위 촉이 발달한 사람들이 있다. 가령 어쩐지 오늘은 점심시간에 부장님이 일찍 들어오실 것 같은 싸한 기분을 잘 느낀다던가, 평소 퇴근 후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만 들고 있는 남편이 그날따라 아이와 시간을 보낸 덕에 아내의 잔소리 폭풍을 비껴가는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매입하는 주식마다 주가가 하락하고, 매도하는 부동산마다 가격이 오르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누군가에게 나와 반대로 하면 당신은 성공할 수 있다는 기준이 될 테니.
결국 재능은 내가 나에게 정의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제 아무리 손흥민 선수라도 본인이 축구가 재능이 아니라고 여겼다면 남보다 공을 잘 찼더라도 그가 축구 선수가 되었을까? 재능의 영역에서 자주 헷갈리는 이유는 '당신의 재능은 무엇이냐'는 질문이 마치 '당신 그거 얼마나 잘해?'로 들리기 때문이다. 우린 모두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재능의 수준이 각기 다를 뿐이다. 물론 선천적 재능의 영역도 있겠지만 그 또한 모르거나, 알아도 연단하지 않으면 그저 그런 수준에 머물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서두에 던진 재능의 정의를 떠올려 보자. '재능이란 단 한 명이라도 인정해 주는 것.' 그 한 명이 나 자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타인의 인정이 필요한 영역으로 나가기 전에 내가 나를 인정해 주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오늘 이 글을 읽고 재능의 정의를 받아들인 당신은 지금 이 시간부터 재능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재능 없음'을 비관하며 '재능 발견'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우리가 선택해야 할 건 단순하다. 나의 재능을 인정하고 반복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