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운동 같은 마음으로 보낸 월요일을 지나 맞이한 화요일은 오전 내내 날이 흐려 피로감이 더했다. 오늘도 카페를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집을 나섰다. 언제나 그렇듯 가방엔 16인치 노트북과 3권의 책이 적절한 무게감을 만들어 익숙한 안정감을 더해줬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우선 책을 펼쳤다. 한 권의 책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을 즈음 두 번째 책을 꺼냈다. 거기에서 만난 한 단어. '자존.' 그리고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설명. '자존은 바깥에 점을 찍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점을 찍는 것이다.' 딱 지금까지 내가 하고 있는 글쓰기였다. 그리고 퇴사 후 이제껏 내가 이어온 삶의 궤적이었다.
"난 돈벌이 빼고는 잘할 자신이 있어." 장난스레 내뱉는 말이었다. 그 이면에는 장난스러움을 빗대 '더 이상 돈벌이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다'는 선긋기와 동시에 '돈벌이에 무능한 자신을 꼬집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순에 나는 나를 존중해주지 못하고 있었단 소리다. 바깥에 찍힌 점을 향해 달려가야 안전하다는 오랜 방식을 여전히 고수하며. 그게 싫어서 퇴사를 했건만.
미국의 교육은 '네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궁금해한다면
한국 교육은 '네 안에 무엇을 넣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
박웅현 저 <여덟 단어> 중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고민하며 살아왔던가. 나이대마다 주어지는 거대한 인생 미션을 클리어하며 살아가다 어느 순간 갑자기 질문이 던져져 대 혼란과 방황을 겪었던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니 책 속의 문장이 마음속에 쿵하고 떨어진 기분이었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엇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다름을 진중히 고민해 본 적 없는 양육자가 아무리 다름을 추구하겠다 마음먹는다 한들 결국 가장 먼저 소거되는 선택지는 다름일 확률이 높다.
다름 앞에 불안하지 않으려면 자존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자존하는 법은 내 안에 있는 것을 깊이 사유할 때 비로소 배울 수 있다. 내면을 깊이 사유하려면 결국 글을 써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가 자존을 세우기 위해 탁월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피라미드 구조의 상부로 갈수록 '답정너'님들을 만났다. 그들은 대체로 답을 가지고 회의를 진행했다. 몇 시간 회의 끝의 감정은 늘 한결같았다. '뭐야, 이미 답이 다 있었으면서 대체 회의를 왜 한 거지?' 글을 쓰며 나를 들여다보니 나도 참 내 인생에 '답정나'로 살았음을 깨닫는다. 그 기준이 내가 아닌 거대한 인생 미션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늘 내 안에 무엇을 넣어야 할지 답을 찾아 헤맸다.
나의 내면을 채우는 다양한 선택들이 가리키는 방향. 나는 그것이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취향 속에 나다움이 있고 나다움이 근간이 되어야 다름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방향을 알기 위한 방법이 글쓰기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여전히 글쓰기 만한 게 없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늘 글을 쓰라고 종용하는 것이다.
퇴사 후 내 삶에는 선뜻 선택하지 못하고 가장 먼저 잘라내는 군더더기 같은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의 매일을 충만하게 만들어 주었다. 생계라는 관점에서 헛짓거리로 보이는 그것들이 돌아보면 자존(自尊)하는 것들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오히려 내일을 기대하게 된다. 결국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될 그날을. 남이 아닌 내가 나를 존중하며 보낼 그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