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옷을 사러 나왔다. 바깥출입이 많이 줄어 옷 사는 것도 예전만큼 흥미가 있지는 않다. 눈으로만 즐기더라도 한 때는 쇼핑하는 걸 좋아했는데. 이 또한 나이가 들어간다는 뜻이려나.
원래 내 옷 살 땐 없던 체력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표준 체형이 아닌 만큼 여러 차례 피팅을 해 보지 않으면 최적의 결정을 내릴 수 없으니 기초체력이 상당히 요구된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지친다. 그래도 차마 한 매장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 건 어쩐지 혹시 있을지 모를 대안을 고려하지 않는 듯하여 딱 마음에 드는 것 한 두 벌을 결제하고 다른 매장으로 향했다.
자주 가는 쇼핑몰인 만큼 평소 눈에 담아뒀던 매장들이 몇 군데 있다. 그동안은 지나가며 훑기만 했고 제대로 본 적은 처음이다. 막상 진열된 옷을 보니 확 끌리는 게 잘 없다. 아내가 골라준 옷 몇 벌을 입어 봤지만 여전히 고개가 갸우뚱한다. 원래 매장 거울로 보면 왜곡되어 보이기 마련인데, 매장 거울로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은 과감히 내려놓아야 한다. 이건 내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나, 둘, 셋, 몇 군데의 매장을 더 둘러보고 커피 한 잔 마신뒤 돌아왔다. 쇼핑을 마치고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첫 째, 적어도 이 쇼핑몰엔 다른 대안은 없다. 첫 번째 갔던 매장이 가장 나에게 맞는 매장이었다. 다음부턴 굳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겠다.
둘째, 나를 포함하여 옷을 구매한 사람들의 최종 선택은 결국 자기가 익숙한 스타일이라는 점이다. 입고 온 스타일과 대체로 비슷한 선택을 하더라는 것. 분명 둘러보며 관심을 보이고 피팅하는 옷들은 여러 스타일인데 정작 계산대 앞으로 들고 가는 건 거기서 거기더라.
셋째, 스타일이냐 실용이냐의 선택지에서 이제는 실용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내를 만나고 변화의 과도기를 지날 무렵엔 나름 과감했다. 이제는 굳이 표현하자면 'once upon a time...' 같은 시절이다. 지금은 한 번 사면 두고두고 입을 수 있는지, 활동성이 좋은지를 더 고려한다. 그래서 집에 청바지만 늘어간다.
넷째, 옷을 살 때야말로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 남들이 입고 다니는 옷이 아무리 예뻐 보여도 내건 따로 있는 법이다. 마네킨에게 속지 말자. 매장 직원들의 착장에 착각하지 말자. 보다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선 내 피부 톤부터 체형, 그리고 오래 만족스러웠던 옷감을 잘 기억해야 한다. 뭐, 소위 본투비 패셔니스트인 사람들은 해당 사항이 아닐 테지만 나처럼 어중간 한 위치에 서 있다면 역시 자기 객관화는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시행착오는 만고의 진리다. 인생의 성공을 논할 때 어김없이 시행착오가 등장한다. 옷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만족스러운 경험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실패한 경험만이라도 잘 기억해 내 보자. 참고로 난 등판에 널찍이 프린팅이 되어 있는 옷은 웬만하면 피한다. 한 여름에 땀이 흡수가 되지 않아 나중엔 땀 냄새가 베기는 경험을 했기에. 이 또한 몇 번의 시행착오를 반복한 뒤 각인된 정보다.
인간이 과연 충동적 소비를 넘어 합리적 소비에 이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리스크는 줄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단계에 이르려면 얼마만큼의 아쉬움이 축적되어야 하는지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인생사도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숱한 자기 계발서에서 실패의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닐까.
오늘 쇼핑에서 얻은 인생 교훈은 자기 객관화와 시행착오의 가치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이 두 가지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다양할수록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덕분에 오늘 바지 한 벌에 티셔츠 두 벌 건졌다!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