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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으로 발견하는 있음

by 알레

오랜만에 위기가 찾아왔다. 1시간가량 아무 글감이 떠오르지 않는다. 들고 나온 책도 펼쳐 보며 저자의 생각을 슬그머니 빌려볼까 했는데 이마저도 다른 무엇으로 연결되지 않아 오히려 저자에게 붙잡힌 기분이다. 역시 이럴 때 유일한 해법은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는 걸로 시작하기다. 오늘도 그렇게 일단 3줄은 썼다.


목요일마다 카페 라이팅 연재를 하고 있어서 돈도 아낄 겸 카페에는 목요일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러기엔 날이 너무 좋다. 겨우내 집 밖에 나가기가 그렇게 싫더니만 이젠 집에 있는 게 싫다. 소속이 회사일 땐 그렇게 사무실을 벗어나고 싶더니, 집이 되니 매일 방구석을 벗어나고 싶어 진다.


글쓰기도 어떤 종류의 작업이냐에 따라 장소에 대한 선호도가 달라진다. 인스타그램 콘텐츠를 위한 글쓰기는 집에서 잘 쓰인다. 혼자 있는 방, 간접 조명만으로 밝힌 책상은 집중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반면 브런치에 글을 쓸 땐 집 보단 카페를 선호한다. 산만함이 오히려 생각에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건 개인 사무실이지 않을까.


봄바람이 부니 다시 공간에 대한 욕구가 차오른다. 지금으로선 카페가 최선이지만 조용히 책을 읽고 글쓰기에 몰입할 수 있는 나만의 장소가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늘 남아있다. 언제쯤 실현될지 몰라 이제는 비현실이 된 꿈을 오늘도 카페 테이블에 투영시켜 본다. 고작 노트북 하나 머그컵 하나 올려두면 남은 자리라곤 여백이라 표현할 정도밖에 없는 그 동그란 테이블에.


시간의 자유를 얻고 난 뒤 의외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과연 난 잘 살고 있는가?'였다. 하루의 시작과 끝의 경계가 모호해진 삶이 때론 지금 내가 힘을 주어야 하는 타이밍인지 빼야 할 때인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 꾸준히 자기 계발에 전념하는지도 모르겠다. 글쓰기, 독서, 콘텐츠 제작, 그리고 육아가 하루의 파티션이 되어 주니까. 아, 참고로 나는 육아는 최고의 자기 계발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중이다.


시간의 자유는 얻었지만 경제적 자유는 여전히 아득한 삶이다 보니 작은 것들에 의미 부여하는 능력이 생겼다. 카페의 테이블에 이상적 공간에 대한 욕구를 투영시키듯, 이미 소유한 것들이 유달리 소중해진다. 노트북, 가방, 옷, 이어폰, 스마트폰, 노트, 책, 신발, 의자, 커피 그라이더 등. 소득이 없이는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미리 소비한 과거의 내가 고맙다. 물론 그때는 순간의 욕구에 충실한 선택이었을 뿐이지만.


살다 보면 '없음'이 가르쳐 주는 '있음'의 지혜를 깨닫는 순간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글감이 없어 내내 두 손으로 머리만 감싸고 있던 나에게 없음 자체도 쓸거리가 된다는 걸 깨닫게 해 줬다. 시간의 없음은 여유 있음으로 변하여 하루를 온전히 나를 위한 것들로 채워 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돈의 없음이 가장 치명적이지만 덕분에 상상력이 커졌다. 소비하지 않고도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얻었다. 그래도 마음껏 소비하고 싶긴 하다.


어쩌면 이것이 없음의 미학일까? 없음으로 있음을 발견하는 뭐 그런 건가? 오늘 글의 제목은 이걸로 해야겠다. 없음으로 발견하는 있음. 빈약한 글이지만 제목이라도 조금은 있어 보이니까. 근데 오늘 정말 글쓰기 어려운 날이다. 진짜 안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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