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귓가에 플레이되고 있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에는 아버지와 형과 함께 했던 오래전, 벌써 약 20년 가까이 된 추억이 묻어있다. 형과 함께 미국 여행 중 출장 중이셨던 아버지와 만나 함께 갔던 한인 가라오케에서 그곳에 계셨던 어른들이 누군가의 선창에 떼창을 했던 곡이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건 이 곡을 부른 사람이 아버지였는지 아니면 그곳에 계신 다른 분이셨는지는 모르겠다.
1.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 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줘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2.
접어드는 초저녁 누워 공상에 들어 생각에 도취했소
벽의 작은 창가로 흘러드는 산뜻한 노는 아이들 소리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나도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3.
고개 숙인 그대여 눈을 떠보세 귀도 또 기울이세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 찾을 수 없이 밤과 낮 구별 없이
고개 들고서 오세 손에 손을 잡고서 청춘과 유혹의 뒷장 넘기며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한대수 님의 <행복의 나라>
그때 처음 들었던 노래이고 심지어 한대수 님은 내 세대의 가수도 아닌데, 이 곡이 가슴에 남아 때때로 재생되는 건 곡의 느낌과 가사에 담긴 정취가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20년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고, 지금은 오히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그 행복의 나라를 당장이라도 눈앞으로 당겨올 것만 같다.
행복한 삶을 꿈꾸는 게 마치 피터팬처럼 자기만의 네버랜드를 꿈꾸는 듯 보였던 때도 있었다. 사회적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게 어른스러운 거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그땐 참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끊임없이 나를 글에 담아 파고 또 파고들수록 그런 성공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이라는 게 또렷해진다. 지금도 불쑥불쑥 어색한 옷을 입으려 할 때가 있지만, 또 그들을 부러움과 동경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볼 때가 있지만 마음은 완강하다. 어쩌면 나는 현실에 몰입할수록 현실감이 떨어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히려 남들이 '현실감'이라고 말하는 그것에서 한 발 물러난 지금이 가장 현실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백수지만 삶은 이전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글쓰기를 시작한 뒤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질문이 있다. '글쓰기는 정말 삶을 바꿀까?' 오늘 내리는 결론은 '바꾼다!'이다. 아니 오늘만이 아니라 오늘 이후로 나의 답은 동일할 것이다. 다만 자꾸 흐릿해지는 이유는 기준이 바뀌기 때문임을 알았다. 나의 기준이 '6개월간 글을 썼더니 월급보다 3배를 벌었어요'라면 '안 바뀐다'로 답이 기울 것이고 '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었어요'라면 확실하게 '바뀐다'라고 말하게 될 테니.
당연히 처음 기대는 돈벌이 쪽이 더 컸지만 마음이 머무는 곳이 거기가 아님을 깨달았다. 돈을 벌고 싶지 않다는 건 아니다. 엄연히 나의 꿈은 글로 돈을 버는 '글로 벌 라이프'니까. 그러나, 그것에 기준을 두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고 따라서 누군가의 성취에도 이전만큼 감정이 널뛸 이유가 사라졌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행복한 삶을 꿈꾼다면 기준을 세워야 한다. 기준이 없으면 삶은 끊임없는 외부의 파동에 휘청거릴 테니. 파도는 언제나 일렁인다. 파도를 타는 사람이 될지 휩쓸리는 사람이 될지는 내 선택이다.
당신은 오늘 어떤 행복을 꿈꾸는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멈출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아님 체념하듯 받아들이고 있는가? 마침 금요일이고, 월 말이니 오늘 밤에는 술자리 뒷담화 보단 조금은 행복을 꿈꿔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