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커피가 익숙해진 생활

- 아가랑 제주도 한 달 살기 중이에요

by 알레


제주도에 내려와 지낸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퇴사하고 설레는 마음 반, 우려되는 마음 반으로 떠난 아이와의 첫 장거리 여행이다. 아이가 잘 적응해준 덕분에 생각보다 대체적으로는 큰 어려움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 부부는 커피를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도 드립 커피를 두세 잔은 마신다. 한 달 살기를 하면서 내내 커피를 사 먹을 수가 없어서 집에 있는 기기를 모두 싸들고 내려왔다. 아가는 통잠을 자고 보통 아침 8시에서 9시 사이에 일어난다.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아이가 일어나는 시간이 엄마 아빠의 기상 시간이다.


아침 분유를 먹이고 나서 장난감에 앉혀서 아이가 혼자 놀 수 있게 해 준다. 그 사이에 우리도 아침 식사를 한다. 간편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난 후 어김없이 커피를 내린다. 회사 생활을 할 때는 누리지 못한 여유를 이렇게 즐기나 보다 싶을 때면 어디선가 강렬하게 힘을 주는 소리가 난다.


돌아보면 아이의 콧등이 빨갛게 불이 켜져 있다. 좋은 일이다. 부모가 되어보니 아이가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것만큼 안도가 되는 것이 없다. 아이에게 충분한 시간을 준다. 사실 '충분한 시간을 준다'의 의미에는 '엄마 아빠도 커피 한 잔 하고 싶다'라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아이는 결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느새 제 볼 일을 끝내고 격렬한 몸부림을 치거나 소리를 지른다.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마음이 또 그렇지 않다. 아이가 불편할 것을 생각하니 결국 마시던 커피 잔을 내려놓게 된다.


아이와 한 바탕 실랑이를 하며 엉덩이를 수습해주고 나면 아이는 다시 장난감에 들어가 있고 싶어 하지 않아 몸을 배배 꼬며 강한 거부 의사를 표현한다. 어쩔 수 없이 안아주고 달래주고 하다 보면 커피는 점점 식어간다. 아이가 다시 졸린 눈을 비빌 때까지 커피는 그 따스함을 잃어간다.


어느새 식은 커피는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커피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물 주전자도 온도 조절이 되는 것을 사용한다. 적정 온도까지 물을 끓여주고 비율에 맞춰 커피를 내린다. 그만큼 핸드드립 커피에 진심인 편이다.


핸드드립 커피의 경우 막 내리고 난 직후 따뜻할 때의 커피 맛과 점점 식어가면서 맛이 변하는 과정을 느껴보는 것도 하나의 즐기는 방법이다. 한 창 드립 전문점이나 로스터리 카페를 찾아다닐 때는 일부러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해보기도 했다.


그때를 떠올려 보면 결과적으로는 같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음미하다'라는 단어가 빠졌다는 것이다.


아기와 함께 하는 생활에서 '음미하는 것'은 사치가 돼버렸다. 식당에 가서도 아이에게 열심히 간식이라도 먹여야 겨우 끼니를 해결한다. 혹여라도 아이가 보채기 시작하면 흡입하는 수준으로 식사를 마치거나 아니면 그냥 남은 음식을 포장하는 방법밖에 없다.


카페에 가서도 아내랑 예전처럼 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거의 드문 일이 되었다. 온 정신이 아이에게로 향하게 될 수밖에 없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쉬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커피를 얼른 들이켜고 난 후 아이를 안고 일어나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마 가끔 카페라는 공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우리 부부에게는 나름 힐링이 된다.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오겠다고 계획했을 때 개인적으로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커피 한 잔도 온전히 마시지 못하는 것이 일상인데 하물며 삶에 대한 고민을 할 정신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나마 아이가 낮잠을 잘 때면 이런저런 정리를 하느라 바쁘다.


생각해보면 그 어느 부모에게 육아가 쉬울 수 있을까 싶다. 조금 익숙해졌다 싶으면 아이는 또 훌쩍 커버려서 다른 과제를 던져준다. 우스갯소리로 육아는 고행이라고 지인들에게 푸념하곤 하지만 사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나의 삶을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하게 만들어 준다.


KakaoTalk_Photo_2021-11-27-23-45-01.jpeg 아빠에게 아가의 미소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쑥쑥 자라나는 아이는 삶에 대한 가장 큰 동기 부여가 된다. 어떤 구체적인 목표보다도 지금의 나 자신이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만드는 것이 바로 내 아이다. 하다 못해 쇼핑몰에 가서 아이의 옷을 보다 보면 사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없음이 가슴 아프기도 하다.


그럴 때면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어본다. 아이에게 다 해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아빠가 되겠다고 말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이에게 신경 쓰느라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만 오히려 여행을 통해 더 강력한 동기부여를 얻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게 되어 매일 몸은 축나지만 그래도 아이와의 첫 한 달 살기를 통해 많은 추억을 남길 수 있어 행복하다.


비록 커피는 식어가지만 아이와 아빠의 시간은 더 따뜻해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