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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며 자존하는 삶을 살기

by 알레

카페의 창 너머로 돌이 겨우 지났을법한 아이를 안고 걸어가는 엄마를 보았다. 무념무상의 표정으로 어디를 바라보는지도 모르겠는 아기의 얼굴을 스치듯 봤을 뿐인데 그 순간 기분이 너무 좋아진다. 찰나보단 긴 시간이지만 찰나와 같다고 할 만큼 아주 잠깐 시선이 마주쳤는데도 이렇게 행복해지는 걸 보면 아이의 존재는 세상을 정화시키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가끔 내 아이의 과거 사진을 돌려 볼 때가 있다. 유치원을 다니는 지금도 아가 같을 때가 많은데 누워만 있던 아가 일 때의 사진을 바라보면 그저 행복감에 젖어든다. 잠시동안이지만 부쩍 자기주장과 고집으로 나의 에너지를 소모시켜 버리는 악동의 모습을 망각하게 된다.


아이의 존재는 그야말로 삶에 대한 근심과 걱정, 염려를 모두 희석시키다 못해 없애 버리는 마법과도 같다. 그래서 무척 소중하고 날마다 더 애틋해진다.


최근 들어 또 고질적인 '쓸모'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가득 들어찼었다. 글쓰기 모임의 새 기수가 시작되기까지 일주일정도 쉬어가는 시간이 있었는데 잡념이 틈타 욕망의 불쏘시개가 되어버린 듯하다. 다시 모임이 시작된 덕분에 마음을 다잡아 본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책을 읽고 글쓰기를 이어가니 다시 벅차오름이 느껴진다.


쓸모에 대한 생각이 들어찰 때마다 어김없이 부딪히는 문제는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어찌 되었든 해결 과제인 건 맞으니까. 그동안 이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이 움츠러들었는데 이번엔 생각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사실 누구도 나에게 '쓸모'를 강요하거나 제 역할을 다 해내지 못하는 이유로 '쓸모없다'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매번 내가 나에게 건네는 말이었고 이는 스스로 느끼는 강한 책임감 때문이라는 걸 잘 안다. 즉, 종종 찾아와 나를 괴롭히는 '쓸모'는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강한 의지와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의 반증이었다. 이제 나 스스로도 그만 좀 괴롭혀도 되는데, 그건 참 여전히 다 덜어내지 못한 모양이다.


나의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다가 문득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열 할의 쓸모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증명해 내기 바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의문도 생겼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은 존재만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이야기한들 그 말이 들리기나 할까 싶지만, 그럼에도 그 말을 계속 건네게 되는 건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창너머로 스쳐 지나간 아기에게서 느껴진 행복감처럼, 내 아이에게서 매일 느끼는 감격스러움처럼 우리는 이미 누군가에게 존재만으로 행복감을 전하고 감격스러움을 건네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단지 내가 나를 그렇게 대해주지 못할 뿐.


가끔 어떤 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연락한 친구가 이런 볼멘소리를 할 때가 있다. "야, 너는 필요할 때만 연락하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되묻는다. "그럼, 넌 나한테 연락이나 했고?" 만약 당신에게 누군가 '쓸모'를 묻는다면 당신 또한 되물어 보라. '나에게 쓸모를 묻는 당신의 쓸모는?' 아, 물론 대놓고 물어볼 수 없는 관계라면 마음속으로라도.


지난 4년간 글을 쓰며 깨달은 건 꽤 많은 경우 나를 갉아먹는 건 결국 '나'였다는 사실이다. 그걸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나를 세울 수 있는 것 또한 '나' 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자존'하는 삶을 살아보자. 아이들에게 존귀하다고 이야기해 주듯 나에게도 동일하게 말해주자. 아이나 어른이나 사람이 존재만으로 귀한 건 변함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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