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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빌런의 등장인가

by 알레

오늘은 초고 쓰기를 잠시 멈추고 다른 글을 쓰기로 했다. 이번 주 내내 속이 시끄러운 날들을 보냈다. 구체적으로 언급할 순 없겠지만 그 중심엔 '감정'이 있음을 느낀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결국 감정이 핵심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조차도 가만히 보면 결국 감정이 좌지우지한다.


관계가 틀어질 때를 되짚어 보면 꽤 많은 경우 미세한 감정의 균열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서운함, 배려받지 못함, 존중받지 못한 마음이 앙금처럼 남아 모습을 감추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귓가에서 속삭인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야, 저 인간은 너를 배려할 마음이 추호도 없다니까.' 악마의 속삭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흥미로운 건 여기서부터는 전적으로 감정에 이끌린 사고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초반에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낸다. "아니, 내가 섭섭해서 그러는 건 아니고...", 또는 "나도 그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는 해. 근데..." 이렇게 시작되는 대화는 역시나 감정의 나열로 끝이 난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상황에 대해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줄 착각한다.


남 얘기 할 것 없이 나도 그런 사람이다. 아니, 나는 오히려 더 감정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감정이 뒤틀리는 순간을 맞닥뜨리는 걸 가능하면 피하고 싶다. 그런데 최근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직, 간접적으로 계속 감정 상태를 건드린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노력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나도 감정이 한 발 앞서서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처음엔 입 밖에도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괴로우니 어디 대나무숲길이라도 다녀와야 할 판이었다.


나를 비롯한 이 상황에 얽힌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한 번 더 깨닫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이성이 아닌 감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작은 균열을 제때 봉합하지 않으면 반찬고 하나로 끝날 일도 수술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감정이 얽힌 문제에는 3 부류가 존재하는 것 같다. 당사자 1, 당사자 2, 그리고 가십걸. 아, 참고로 가십걸은 미국 드라마의 제목인데 극 중에 등장하는 가십걸의 역할은 말 그대로 다양한 소문을 옮기는 것이다. 진위 여부를 떠나 사람들이 혹할만한 소문을 전파하는 역할 말이다.


이번 일도 정작 당사자 간에는 오히려 잠잠한데 '가십걸'들이 본질을 흐리는 걸 계속 목격하면서 본질에서 벗어난 말들이 얼마나 빠르게 전파되는지에 놀랐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말 본질에는 관심이 없음에 또 한 번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타인을 대하는 것에 전보다 조심스러워졌다. 무엇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섣부르면 안 되겠다는 마음도 갖게 되었다. 또한 '배려'라는 것에 대해서도 질문이 생겼다. 누군가는 자신의 관점에서 '공동체의 편리'라는 측면을 개선하는 게 '배려'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정작 그 상황이 공동체에 불편함을 야기시킨다면, 이것은 정말 배려가 맞는 걸까? 하는.


갈등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차라리 일찍이 수면 위로 들춰진 것은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덕분에 봉합해야 하는 피로도와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에너지를 쓰게 만든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유감스러움을 감출 수 없는 입장이다.


모쪼록 현재의 갈등 상황이 해결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만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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