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고, 누구도 나에게 책임감을 지우지 않았는데 어느새 내가 나에게 출처가 없는 프레임을 씌워 누르고 있는 걸 알았어. 그래서 내려놓기로 선택한 거야. 그리고 한 벌 더 나아가 떠나기로. 누구도 '내 삶'을 살아주지 않잖아."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내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과거의 나였더라면 꺼내지 못할 말이었다. 나를 존중하며 진짜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한 상태로 내뱉는 말들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었나 싶을 만큼 대화를 이어가는 내내 자신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삶은 무수한 선택으로 이어진다. 선택마다 감당해야 할 감정적 반작용의 크기는 다르지만 '감정'을 떼어놓고 보면 남는 건 선택을 했냐 안 했냐 뿐이다. 선택의 영향이 나에게만 향하는 경우라면 큰 부담이 없지만 그것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좀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꽤 많은 경우 선택을 보류하거나 '우리'를 기준으로 선택했다.
'우리'라는 표현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가끔 '나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유롭고 싶은데 자유로우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우리'를 위해 그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옳은 것이라 여겼다.
그 선택이 남긴 건 가슴 한 편의 응어리였다. 솔직히 이마저도 모르고 살았다. 당연하게 여겼으니 응어리가 지는 줄도 모른 체 수용하고 살았던 것이다.
퇴사하고 지금껏 만난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서 벗어나 '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건, "내 삶을 사세요"였다. '나'는 무엇을 선택해도 괜찮은 존재라고 이야기했다. 더 나아가 나의 선택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건지는 내 몫이 아닌 상대방의 몫인데 왜 그것까지 신경을 쓰느냐는 말을 들었을 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줄곧 상대의 감정을 먼저 살피는 사람이었으니까.
어릴 적엔 착한 아이 었고, 학창 시절엔 대체로 바른 학생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다정한 사람이었으며 공감과 배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좋은 평판을 받는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지나온 삶에서 모 잘랐던 2%는 '이 모든 것이 진짜 내가 원한 것이냐'에 대한 부분이다. 내가 원한 것보단 '남들이 원하는 모양'에 맞췄던 것이 더 많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내가 권위자라고 여기는 대상이 엄중한 말투로 무언가를 지시하면 거절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코칭을 받으며 나에 대해 돌아보면서 깨달은 건, 세상에 나를 제외한 모두는 사공이라는 것이다. 그 많은 사공들은 저마다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어서 노를 이렇게 저어라, 저렇게 저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노를 저어야 할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다.
물론 훌륭한 조언들도 있다. 그럼에도 전부 귀담아듣다 보면 정작 내가 헷갈리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 필요할 땐 경청하되 선택을 위한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다.
'누구도 내 삶을 살아주지 않는다'는 말은 인생의 진리이다.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들도 그들의 삶에 이미 충분히 버거운 사람들이다. 또는 자신들의 버거움을 함께 지우고 싶은 '우리'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일전에 지인이 해준 말이 있다. "알레 님, 진짜 누군가를 돕고 싶으면 먼저 알레 님부터 성장하세요. 그리고 성공하세요." 지금 이 시점에 다시 한번 깊이 새겨본다.
2025년 마지막 3달을 남겨둔 시점에서 나는 다른 어느 때보다 인생에서 중요한 기로에 서있음을 직감한다. 그래서 더 긴장되면서 동시에 흥분된다. 줄곧 이야기하며 살았던 '나다운 삶'이 이제야 실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기분이다.
나를 믿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삶. 과연 이 삶의 여정은 3개월 뒤 나를 어디쯤에 서있게 할까. 기대되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