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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rce Jul 01. 2019

계급사회라는 것 (- 영화 기생충 리뷰)

너무 뻔한 리뷰지만, 계급사회에 대한 경고.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개봉하자마자 거의 바로 보았지만, 감상평은 참 늦게도 올리게 되었다. 이래저래 뒤늦은 생각들을 정리해두면 좋을 것 같아서 개인적인 감상평을 써보기로 하였다.


기생충을 보고는 한동안 멍했다. 기분이 좋은가 나쁜가의 문제라기보다는 던져진 질문들에 대하여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럴 때 보통 나는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찾아보는 편인데, 이유는 그 과정이 언제나 의견을 구체화하고 객관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의견으로 ‘멍하다’ 라던지 ‘계급 사회를 분명히 드러낸 부분이 흥미로웠다’ 라던지의 평들이 있었는데, 내가 흥미롭게 느낀 부분은 약간의 분노가 서려있는 댓글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 분노는 무엇에서 기인되는 것일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화가 난 사람들이 적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하층민을 너무 기생충처럼 묘사한 부분, 결국은 희망(?)을 제시해주지 않은 결말 부분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첫 번째 이유의 경우, 반지하에 살고 있는 기택, 기우의 가족과 지하에 살고 있는 문광 부부는 부잣집인 동익, 연교 부부의 재산을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기생충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같은 계급일 수 있는 다른 노동자를 몰아내는 데에 한치의 양심적 가책조차 결여되어 보인다. 기택의 가족은 결국은 동일한 계급에게 일종의 사기행위를 통해 일자리를 얻어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여기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정말 서민 계급은 이렇게나 비양심적으로 서로를 밀어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 계급 안에 속해서 본인의 양심을 지키며 열심히 하루하루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마치 그 계급 자체가 기생충처럼 묘사되는 것에 분노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흠.. 생각해보니, “나는 저렇게 기생충처럼 양심까지 저버리며 아등바등 살지 않아!”라고 하기에는 나 또한 재벌가의 기업에서 하루하루 돈 벌어 연명하는 노동자 계급으로써,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입장으로... 독하게 살고 있는 내 모습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여유 없고 자비 없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로, 결국은 지하에 갇혀버린 기택을 계급 상승을 통해서만 빼낼 수 있다는 결말은 현실적이면서도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기우가 그 집을 부동산 중개인과 걸어 들어가는 장면이 너무나 꿈결같이 느껴졌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 같아서였을까..? 이 영화를 본 모두는 현실적으로 기우가 부자가 되어 그 집을 사는 것. 그것이 정말 적은 확률이며,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관객들은 결말에서 희망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 물론 모든 영화가 결말을 기분 좋게 끝맺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반지하, 지하층에 사는 계급의 사람들은 적어도 어떤 반전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계급 사회를 보여주면서 심지어 이미 유명 감독, 유명 배우들인 부유한 계급이 만들어낸 영화가 판타지일지언정 아무런 희망조차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계급에게는 기만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기생충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처럼 현대 사회를 극적으로 과장하여 풀어낸 시니컬함 때문이었으리라-. 반박할 여지는 많은데 또 묘하게 공감도 되면서 불쾌하면서 통쾌한 기분도 같이 드는 오묘한 느낌. 반지하에, 지하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양심을 잃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지언정 부유한 사람들보다는 더 치열하게, 악착같이, 강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그 큰 집의 지하실에서 기우가 기택을 구출할 수 있는 방법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집을 사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비현실적인 방법이기에 모두에게 씁쓸함을 안겨주었다면 그 또한 현대사회가 그러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들의 감상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나는 저 극단적 계층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며 자위하고는 이 꿉꿉한 기분을 흘려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세상 사람 누구나 상대적인 계급을 가지고 살아간다. 반지하에 살지 않다는 다고 해서, 정원이 딸린 대저택에 살지 않는다고 해서 이 영화를 가볍게 지나가서는 안되는 이유다. 나는 지하철의 꾀죄죄한 누군가를 보며 동익이나 연교처럼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을까? 또 그 누군가는 내가 가진 저가 브랜드 제품을 보며 기우 기택 가족의 냄새를 맡은 듯 무시하진 않았을까? 인간 사회에는 태초부터 끝없이 계급이 존재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만큼 극단적이고 경쟁적인 개인 의 계급 쟁탈전은 유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쟁적이고 참담한 계급 사회의 말로는 무엇일까. 결국 기우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큰돈을 벌어서 그 집을 사는 것 만이 유일한 탈출로인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기생충에서 말하는 계급 사회의 결말인 것일까.


봉준호 감독이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멋대로 나는 영화 안에서 무언의 경고적인 메시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모종의 상류층에 보내는 경고였다. (물론 내가 상류층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편견 없고 때 묻지 않은 존재로 나오는 부잣집 막내 다송이는 결국 다른 계급으로부터 끊임없는 트라우마를 가지는 사건들을 겪게 되고, 반지하 계급 사람들을 고상한 척 무시하던 동익은 결국은 그 계급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재밌게도 부유층에 속하는 나의 한 친구는 이 영화를 보고는 공포에 떨었다. 사람 무시하다간 죽을 수도 있다며...) 결 계급 사회에서 오는 과실을 따먹고 있는 상류층조차도,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그 밑의 계급에 의해.. 역사적으로도 이런 사실은 증명된다. 극단적 불균형은 언제나 대중의 분노로 치닫게 되고, 그들이 칼을 갈게 했다. 결국은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이 극단적 불균형은 상류층에게도 언젠가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아직은 손을 쓸 수 있을 때, 뭔가 바꿔야 하지 않을까. 기우 기택네가 사기를 치지 않고도 폭우가 오더라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집이 있을 수 있다면... 기우가 돈을 벌어서 집을 사지 않아도 기택을 구출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동익이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이라면.. 그럼 얼마나 좋을까? 그 how를 찾는 사람이 아마 마르크스, 애덤 스미스를 잇는 역사적 위인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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