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상사가 기른 피해망상 괴물
최근, 많은 우여곡절로 글을 쓰지 못하였다. 회사에서 8년 만에 직장 상사가 바뀌었다. 나의 상사는 50대의 '그'에서 40대의 '그녀'로 바뀌었고, 그녀는 내가 입사한 후로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내가 오래전부터 멀리하던 사람이었다. 회사 사람들과 그다지 친밀한 편이 아닌 나였지만, 그녀만큼은 더 확고하게 멀리해왔다. 왜냐하면 그녀는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였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란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특성을 가지는데, 첫인상이 굉장히 좋다는 특성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한다. 내가 만난 그녀도 처음에는 나에게 정말 잘해주었기에, 나는 그녀를 신뢰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본색을 드러냈다. 그녀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한 명, 한 명 나에게 욕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늘 붙어 다니는 그녀의 친한 그룹원들도 비난의 대상이었다. 앞에서는 늘 하하호호 잘 지내는 사람들이었는데도 그녀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나 보다. 그녀는 특히 경쟁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상종도 말아야 할 사람들처럼 묘사하곤 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보다 주목받는 다른 사람들을 견디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녀는 어느 정도 나에게 친밀감을 쌓은 뒤 본격적으로 나의 업무 결과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성과를 위해서라면 어떤 누구든 착취하는 것에 능했다. 본인도 그다지 대단한 업무 성과를 내는 사람이 아닌데도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지를 나에게 끊임없이 말하곤 했다. 그리곤 나의 모든 업무에는 서슴없이 지시하고 책망했다. 그녀의 지시를 따랐을 때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녀의 것이 되었고,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나의 탓이 되었다. 이 또한 나르시시스트의 특성이라고 하는데, 난 당시 나르시시스트라는 인격 장애의 존재조차 몰랐으므로, 나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채찍질해야 했다. 그녀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곤 했고 심지어 그녀에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꽤 오래 그녀에게 시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늘 자신만만하게 방향성을 제시하는 사수였기에 업무는 늘 그녀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나는 어수룩한 신입사원에 불과했고 그녀는 자기 말에 토 다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여러 업무 방향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곤 했고, 난 그 모든 일을 수행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한 신입사원이었다. 어떻게든 지시한 일들을 다 해간다고 해도 퀄리티는 내가 봐도 엉망이었다. 난 점점 내 직무에 자신감을 잃어갔고, 그녀 또한 점점 나의 가치에 의문을 가지는 듯했다. 그리고 몇 명의 신입사원이 더 들어왔을 때,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버렸다. 사실 그녀가 나를 버린 것인지, 상황상 그렇게 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찌 되었든 난 입사 때부터 속해있던 그녀의 그룹에서 탈락되어 나오게 되었다.
탈락되어 나와보니 그녀와 그녀의 그룹이 더욱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무리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철저히 배제하였다. 그녀의 그룹에 속해 있을 때는 그녀 빼고 모두가 이상해 보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늘 모두가 이상하다는 것을 아주 반복적으로 나에게 주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와 멀어지고 나니, 그들은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본인이 유능하다고 믿는 그녀의 잣대를 따르면 그녀도 늘 욕먹을 행동은 충분히 많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외의 다른 회사 사람들은 회사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남들과 나누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말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녀가 나에게 남긴 악취 나는 말들을 그저 삼키고 삼켰다.
그녀와 멀어지고 난 뒤 의아하게도 나는 더 업무를 잘하게 되었고 업무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그녀에게 착취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녀의 지시가 없으니 오히려 결과들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내가 일하는 방식이나 양이 변한 게 아니었다. 단지 그녀와 멀어졌을 뿐인데 왜인지 일이 잘 되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니 그녀의 고집스럽고 이상한 확신에 찬 업무 지시가 오히려 모든 일을 망치는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평생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서 원인을 찾지 않고 늘 다른 원인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서 나는 한없이 무기력했다. 그녀의 이미지가 너무나 대외적으로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좋아 보였다고 해야 하나. 그녀와 일해보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은 늘 멋진 모습으로 먼저 다가오는 그녀를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는 늘 그룹을 이루었기 때문에 영향력 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와 반대로 난 회사 사람들과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만행을 폭로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에겐 그 미소 띤 가면 쓴 관계들을 들춰낼 용기가 없었다.
그녀가 직속 상사로 진급한 뒤, 내가 취할 수 있었던 행동은 그녀를 멀리하는 것뿐이었다. 나를 뒤에서 욕하고, 나를 착취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직장 내 괴롭힘 수준이라고 여겨질 행동들이 많았지만 그저 피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직속 상사였기 때문에 아무리 멀어지고 싶어도 업무적으로 엮인 일들이 너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다시 착취당하고, 갈취당하고, 권위에 굴복해야 했고, 철저히 소외당해야 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발버둥 쳐봐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나르시시스트. 자기애성 인격장애라는 것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 그들의 설명을 읽었을 때를 잊지 못한다. 어떻게 이런 모순적이고 디테일한 그녀의 모든 면들이 마치 관찰일지처럼 적혀 있을 수 있지? 정말 이런 사람 유형이 인격 장애로서 존재한다는 것일까? 너무 사소한 부분까지 비슷했기에 나는 확신했다. 그녀는 나르시시스트였다. 어딘가 뒤틀려진 사람들. 자신을 포장하고 꾸며내지만, 막상 속은 텅 빈 사람들. 남의 감정, 능력 모두 흡혈귀처럼 빨아내서 연명하는 그들. 사람을 이용의 대상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게 가엾기까지 하다.
그들과 관련하여 또 하나 재밌는 점을 발견했는데, 그들 옆에는 늘 누군가가 기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의 매력, 권력, 능력을 어떻게든 어필하고 다닌다. 마치 센과 치히로의 가오나시가 금으로 온천 직원들을 유인한 후 잡아먹는 것처럼, 실질적으로 선물을 준다거나, 권력을 나누어 주는 등의 방식으로만 사람을 모으는 부류다. 내가 봐온 어떤 이들은 그들이 주는 선물, 권력, 정보, 혹은 인맥 등을 기대하고 그들의 그룹원으로 함께하는 듯했다. 왜냐하면 나르시시스트를 진심으로 좋은 사람으로 여겨 옆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르시시스트를 욕하면서도 그들의 부정과 착취를 눈감아주고 함께하곤 했다. 그들은 왜 그들과 공생하는 것일까? 공생할 수 없었던 나약한 나로서는 그들을 욕하면서도 함께하는 그들의 이유를 알 길이 없다.
세상엔 운이 좋게도 앞서 말한 자기애성 인격 장애자들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마 이 글을 읽으며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가 잘 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소시오패스, 편집성 인격장애 등 다른 인격 장애자들까지 합하면 인격 장애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사적인 관계야 멀어지면 그만이지만, 회사에서 그런 사람들을 상사로 만난다면 감당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찾아온다. 그런 분들에게 전하고 싶다. 내가 당신의 고통을 일일이 알고 있다고.. 나는 그녀가 만든 착취의 역사 속 어디선가 울분이 차올라서 새벽에 잠을 깨면 잠을 잘 들지 못하고, 울컥해서 갑자기 울음이 터지기도 한다.
이 괴물이 나를 또 다른 인격 장애 괴물로 만들어가는 것 같아서 두렵다. 피해망상과 편집증으로 사람들에게 날이 서있는 나 자신이 스스로도 낯설다. 하지만 이런 위태로운 상태의 나를 어떻게든 응원해주고 따듯하게 보듬어주는 친구들 덕분에, '이런 너여서 우린 친구가 된 거야.'라고 말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괴물이 아닌 약할지언정 사람인 채로 이 세상을 살아가려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