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일탈 중입니다.
나는 요즘 평가를 당하는 것을 어떻게든 미루는 중이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30년을 단 한 순간도 평가받지 않고 살아온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갈고닦은 무언가가 있다고 해도 굳이 관련된 시험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계속 영어 공부를 하지만 영어 시험을 치지 않고, 취미로 글을 쓰지만 공모전에 글을 낸다거나 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자신이 없어서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결과를 마주할 용기가 없다고 하겠다. 평가라는 것은 준비하는 과정도 힘들지만, 평가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은 더욱 두렵다. 만약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닐 경우에의 슬픔, 실망감.. 극적인 감정들을 오롯이 마주하는 것이 왜 이렇게 지칠까.
감정적 회피라는 것도 알고 있고, 동시에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누군가에겐 영어 점수가, 공모전 당선이, 자격증 당락이, 유튜브 구독자, 인스타 팔로워 수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할 것이다. 나도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시험을 기피하고 있을 뿐, 회사원이기 때문에 매년 업무 평가를 당하는 입장이다. 그 해의 성과에 따라 연봉이 책정되는데, 평가를 당할 때면 '모두 똑같이 열심히 하는 와중에 결과만 놓고 평가하는 사람도 얼마나 고역일까.'.. '저렇게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려면 평가 시스템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꼭 필요한 걸까..?' 등등 생각이 많아진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업무 평가 외에도 진급을 위한 영어 시험이라던지,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과 같은 도전하고 평가를 당해야 하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따라올 것이다. 되도록이면 빨리 남들보다 내가 얼마나 나은 가치를 가졌는지 객관적으로 설명해두는 것이 좋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뒤쳐진다는 기분이 들면서도.. 어쩐지 요즘은 이런 시스템으로부터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어 진다.
어릴 때는 시험이나, 목표를 정해서 나를 다그치며 공부를 한다던지, 스킬을 익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왜 시험을 쳐야 하는지' 생각해기도 전에 이미 나는 많은 시험을 치렀다. 남들보다 부족해 보이고 싶지 않다는 그 결핍된 욕망. 그리고 점수만 잘 따오면 찾아오던 가정의 평화. 이 두 가지가 나를 움직이게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객관적인 '점수'를 따고자 움직였다. 얼마의 돈을 받으며 일하는가. 얼마나 좋은 점수를 받았는가. 나는 무슨 등급을 받았는가. 남들에게 객관적으로 인정받으려고 했다. 아니 인정까진 필요 없어도, 부족해 보이긴 싫었다고 해야 할까. 꽤 최근까지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사회. 잘 팔리는, 인기를 끄는 물건, 사람, 음악, 글.. 을 만들어 내는 것이 최종의 목표가 아닌가. 모든 가치는 결국 돈이라는 물질로 환산되어 오히려 순수한 객관성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인류사가 꼭 그런 치열한 약육강식의 규칙 속에서만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고흐의 그림은 살아생전 지독히도 팔리지 않았지만 사후 재평가를 받았고, 가수 양준일 님의 노래는 30년이 지나고야 빛을 발했다. 이런 경우를 보면 '당장 팔리지 않았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닐지도?'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지금 당장 팔린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가치 있는 것도 아니다. 대중적으로 히트 친 가수의 노래가 알고 보니 표절인 경우도 부지기수. 지금 보면 촌스러운 것이 그 전에는 잘 팔린 경우도 있다. 이 세상에 팔리지 않는 것들을 창조해 낸 모든 디자이너, 개발자, 작곡가, 화가, 요리사.. 등등. 지금 당장 객관적인 성과가 없다고 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성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쭙잖은 위로나 패배자의 자조라기보다는, 팬레터를 보내는 마음에 가깝다.
객관적 인정을 받는 것. 남의 시선 위에 우뚝 서는 경험... 시험을 봐서 취득한 점수를 통해 내 노력을 증명해내고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준다는 것. 내가 창작한 콘텐츠를 통해 다수의 팬이 생겨나고 공감해주는 것. 모두 누구에게나 짜릿한 경험임이 분명하다. 분명 직업적으로도, 생계유지에도 꼭 필요한 과정으로 보인다. 그것이 곧 자아실현,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일 것이다.
최고 등급이나 점수를 받는 것, 높은 조회수를 받는 것, 많은 돈을 버는 것, 좋은 학교를 가는 것, 좋은 회사를 가는 것... 모두 이루고 나면, 혹은 잃고 나면 허무해지는 것들 뿐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여 보람을 느낄 것인가? 내가 해낼 수 있는 것을 어떻게 더 갈고닦을 것인가? 가 아닐까. 가끔은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더 좋은 결과가 나올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