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사람들에게
휴직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 주에는 꽤나 밝고 긍정적인 나로 돌아오게 되었다. 충동적으로 회사를 뛰쳐나왔다. 충동적이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도 나 자신을 아끼지 않는 인간이다.. 주변에선 계속 쉬는 게 좋겠다고, 너 그러다 또 몸 아프다고.. 나보다도 나를 걱정해주었는데 나는 왜 그토록 멈추는 것이 무서웠을까. 왜 그것이 나약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회사를 벗어나자 지독하게도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들이 비로소 멈춘다. 나같이 나약한 멘탈의 소유자와 이런 경쟁적인 회사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자 친구가 말했다.
"너처럼 10년 가까이 회사 생활을 견뎌냈다는 것은 어쩌면 네가 회사에 잘 맞는 사람이라는 걸 반증하는 거야. 그게 아니면 잘 맞지도 않는 회사를 그만큼 버텼다는 거잖아.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충분히 강한 사람이라는 거야."
나는 모든 시니컬한 생각을 멈추고, 그 어느 때보다 회사와 나의 관계, 나와 동료의 관계, 나와 친구들의 관계, 나와 가족과의 관계. 모든 관계들에 대하여 생각한다. 내가 편집증과 피해망상이 매우 극에 달하였을 때, 나는 인간 그 자체가 너무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해결해볼 어떤 의욕조차 없었다. 직장 동료들로부터 시작된 인간에 대한 혐오는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내가 아끼던 사람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 내가 조금만 피해를 보는 것 같으면 쉽게 날이 스고 실망했다. 나도 이기적일 때가 있음에도, 사람들의 이기적인 행동을 볼 때마다 이 관계들을 다 놓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스스로 너무나 무서워서 멈추고 싶었을 때쯤, 나는 우여곡절 끝에 회사를 쉬기로 했다.
회사를 쉬면, 금전적으로도 커리어적으로도 너무 막막할 것 같았다. 실제로도 휴직을 하고 며칠간 나는 방에 틀어박혀 내 머릿속의 걱정들이 너무 시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지도 않던 게임을 하며 그 시간들을 어떻게든 때웠다. 왜인지, 나는 별것도 아닌 일에 내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 누구에게도 이 얘기를 더 이상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도 사람인데 언제까지 내가 쏟아내는 악한 감정들을 받아낼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에는 어떤 해답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말해서 풀어갈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다. 상황에는 답이 없었다. 상사의 태도가 바뀔리는 없었다. 그 상황에 무너져버린 내가 어떻게든 변하는 게 유일한 답인 것 같았다. 하지만 쉽게 변할 수도 없었다. 지금의 나는 누굴 만나든 날을 세우거나 내 안에 곪은 아픔만을 끊임없이 전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을 만나서 사람에 관한 긍정적인 경험을 쌓아보는 게 좋다는 의사 선생님의 조언을 따라, 조금은 조심스럽게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해 만나며 나의 이야기, 상태 등을 털어놓았다. 어제는 일본에서 일하는 친구가 내 상황을 설명하자 전화가 왔다. 난 기억을 더듬어 이미 오래전 일같이 느껴지는 회사에서의 일들을 짧게 요약하여 휴직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 이야기엔 이미 감정이 없었다. 나는 가끔 너무 감당이 안 되는 감정은 저 깊숙한 곳에 묻어버리곤 한다. 감정조차 죽어버린 별 일도 아닌 것 같은 이 이야기를 일본에서 어렵게 시간 낸 친구에게 30분 넘게 토로하다 보니 난 또 내 아픔만을 전하는 것 같아 미안해졌다. 이런 내 맘을 안 것처럼 친구는 다 듣고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말하느라 힘들었지? 이렇게 다시 나한테 얘기하기 위해서 넌 네가 힘들었던 시간들을 다시 꺼내본 거잖아. 나는 네가 힘들 텐데도 이렇게 나한테 얘기해줘서 너무 고마워."
흠......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표현력이 좋아서 나를 울리곤 한다. 바쁜 친구들이 다들 시간을 내서 나를 만나고 위로해준다. 육아 휴직한 직장 동료 분도 갑자기 전화해선 내 안부를 묻는다. 그저 직장 상사라고 생각했던 분이 휴직 기념으로 케이크를 사주셨다. 난 정말 그들에게 준 게 없는 것 같은데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큰 위로를 주는지.. 나로서는 정말 감사하면서도 회개의 마음을 들게 한다. 준 것도 없는 나의 슬픔을 같이 슬퍼해주고 위로해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바쁜 사람들이라는 걸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는 것 자체가 너무 사랑스럽다. 나보다 나를 더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들 덕분에, 나는 다시 웃고, 또 울고, 그들과 함께한다.
나는 사람을 잘 챙기는 사람이었을까? 진심으로 돕고, 위로했을까.. 나를 돌아보게 된다. 만약 내가 계속해서 혼자서 해결하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난 아마 더 곪고 곪아 끝내 썩어버렸을 것이다. 전에 회사분이 어떤 힘든 일에 연루되었을 때,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한마디 건넨 적이 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이 말 한마디가 계기가 되어서 난 그분이 우리 부서를 떠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어떻게든 힘이 되어드릴 수 있었다. 그분은 아직도 나에게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얘기하시곤 한다. 난 상황을 해결해드리지도 못했고, 그다지 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말이다.
아마 모두가 진심을 다해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진심의 정도는 어쩌면 그다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인간관계는 우리를 가끔 회의적이고, 포기하고 싶게 만들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이번에 또 깨닫는다. 그들이 보여준 신뢰, 사랑, 위로 모두 다시 그들이 힘들 때 되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