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기 위해 3만 피트 위로 떠나곤 했던 나
이토록 오랜 휴식을 취해본 게 몇 년 만인가 싶다. 아마도 10년 만이다. 결국 이런저런 타의에 의해 쉬게 된 거지만 난 절실히 이 휴식이 필요했다. 지난 세월, 나는 나를 어디까지 몰아세운 것일까. 나는 20대 내내 지독히도 쉬질 못했다. 재수를 하지도, 대학에서 휴학을 하지도, 대학교와 인턴 비슷한 것을 병행하느라 제대로 된 방학을 가져본 적도 없다. 졸업도 전에 취업 확정이 난 상태였기 때문에 취업 준비 기간을 가져본 적도, 결혼을 하거나 하여 육아휴직을 한 적도 없다. 어떤 누군가가 보기에는 어쩌면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브레이크를 어떻게 잡는지도 까먹은 채로 매 순간을 어떻게든 넘기고 나면 인생은 더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망가져갔다. 내가 망가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건강이 계속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몸이 망가지면 고치면 그만이었는데, 정신이 무너지니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나약한 멘탈을 가진 예민한 사람일까. 몸이 아픈 것보다 정신이 아픈 게 더 견디기 힘들었다. 일단 스트레스에서 오는 무기력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정말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식욕도 없고, 수면욕도 없어졌다. 뭔가를 시작하고 싶다는 에너지 자체는 애초에 오래전에 사라졌었지만 기본 욕구까지 사라진 몸이라니. 마치 몸이 제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외치는 것처럼 모든 욕구를 거부했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나고, 뭐가 그렇게 억울했는지, 뭐 때문에 그렇게 쉬는 게 두려웠는지... 회사에서 벗어나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니 기억상실이라도 걸린 듯 흐릿하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 '내려놓음'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힐링', '소확행'이라는 단어도 많이들 사용한다. 하지만 나에겐 뭔가를 내려놓기엔, 조금은 뒤처져도 괜찮다며 자위하기엔 이 세상은 너무나 치열했다. 내가 뭔가를 내려놓으면 누군가가 바로 채갈 것만 같았다. 나에게 세상은, 회사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나는 내가 적당히 어느 정도 내려놓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만 죽어라 하기보다는 중간중간 '의도적으로' 쉬었다. 어떻게든 일을 외면하고 정시 퇴근을 했고, 여행도 주기적으로 갔다. 서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친구들, 남자 친구도 있었다. 맛집도 종종 찾아가고, 영화나 전시도 봤다. 난 그게 내려놓은, 적당히 힐링하며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어쩌면 그 정도의 적당한 휴식 덕분에 지금까지 어떻게든 버텨왔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 진부하지만 해외여행을 나의 힐링 방법이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나는 모든 여행 과정 중에 비행기 타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었다. 그렇게 위험하고 답답한 공간이 왜 좋냐고 친구들이 물을 때면, '아무것도 결정할 것도 없고, 그렇기에 고민할 것도 없는 공간이어서 좋다.'라고 답하곤 했다.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정해져 있는 메뉴가 있으니. 뭘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다. 영화보기, 음악 듣기, 책 보기.. 비행기를 탈 때면 자연스럽게 모든 관계와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곤 했다. 3-4만 피트 상공에 전파를 보내올 이는 없으니까. 난 비행기에서 내린 후 모두에게 나의 부재를 정당하게 설명할 수 있으리라. '연락했었구나. 비행기 안이었어서 지금 확인했다.'라고. 나는 그 좁디좁은 이코노미 1석 분의 고요함을 사랑했다.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요동치던 뇌세포들을 하나하나 정지시킨 채 쉬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 걱정 없이, 아무 고민 없이, 그저 지금 존재한다는 것 만을 온몸으로 느끼며 깨우친다. 굳이 저 상공으로 도망치지 않아도, 온전히 쉴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