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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의 진실

돌파.

by EASYSAILING

영국에 사는 EJ가 놀러 왔다.
파리에 처음 온다는 친구를 위해 고심 끝에 준비한 주말 일정엔 베르사유 궁전 방문도 있었다.
RER C를 타고 베르사유 샤토(Versailles Château)에서 내리니 아름다운 가로수 길이 나온다. 전날 내린 비로 선선한 아침, 기분 좋게 가로수 길을 걸었다. 멀리서 보이는 베르사유 궁전의 외관은 퐈려했다.
보통 금색 장식을 하더라도 '이토록 금색'은 아닌데..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의 황금색 데코레이션이 화창한 햇볕에 빛나는 이 이미지...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하고 생각해보니,


"야, 이거 태국 왕궁 같지 않냐?"
우연의 일치인지 EJ는 이십 년 전 태국에서 만난 친구. 우리가 가는 길에 황금빛 궁전들이 있구나 친구야..
첫눈엔 웅장하고 와우- 이펙트가 있었지만 보면 볼수록 이 금색 장식이 과해 보인다. 이탈리아 친구들에게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이 샛노란 황금색 뭥미. 건축은 너네가 정말 낫다야."
친구들의 답이 하나같았다: "그게 걔네의 그랑져(Grandeur)잖아. 되게 유명해"
프랑스는 유럽의 중국, 영국은 유럽의 일본, 이탈리아는 유럽의 한국이라던데 이렇게 대놓고 금으로 치장하고 뽐낼 만한 성향은 프랑스와 중국 이 두 나라만 가진 듯하다.

Versailles est le plus célèbre château du monde로 시작하는 베르사유 소개 영상



궁전을 향해 걸어 다가가는데 유난히 오른쪽에 많이 몰려 있던 사람들의 의미를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줄 뒤에 줄, 그 뒤에 또 줄이 있고 그 뒤에도 있는 것 같았다. 설마 이게 한 줄은 아니겠지. 줄에 있던 누군가에게 물어보니,

"이게 표 있는 사람 줄이라오. 아마 여기로부터 1시간 45분쯤 더 걸릴걸."


허걱..
얼른 EJ를 이 줄에 세우고 나는 매표소를 찾아 나섰다.
궁 한쪽에 있는 건물에 매표소가 있었다. 줄의 끝에 서긴 했나 조그만 방들로 나눠진 특유의 구조 때문에 앞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엉뚱한 인포메이션 줄과 매표소 줄 사이의 혼란의 대이동이 있었고 내 차례가 올 즈음 나는 이미 피로성 멍을 때리고 있었다.

표를 산 뒤에도 한여름 땡볕 아래서 한 시간 정도를 더 기다렸다. 궁전 앞 광활한 광장 밝은 바닥에서 반사되는 빛까지 정말 진 빠지게 했다

시간이 지나 우리 차례가 되긴 했으나 궁전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닝겐은 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살롱으로 보이는 비교적 넓은 공간에 이르자 길은 둘로 나뉘었다. 그냥 계단으로 나가버리던가(왼쪽) 투어를 계속하던가(오른쪽).

오른쪽 상황을 보니 금요일 밤 홍대 앞도 이 정도는 아닐 듯했다.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다. 우리 정원 먼저 보고 그 뒤에 돌아오자"

왼쪽으로 나오니 사람이 드문 대리석 계단. 이제야 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려가는데 안전요원이 길을 막는다.

"표를 이미 찍었으니 한번 나가면 다시 못 들어오는 거 아시죠?"


표 사느라 선 줄을 생각하면 매몰비용이 너무나 크다. 차마 여기서 과감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다시 돌아가 돌파할 수밖에..

그런데 그게 정말 '돌파'가 될 줄이야...

대부분의 성 인테리어가 그렇듯, 방들이 주욱 연결되어 있고 문은 창 쪽에 일렬로 나 있어 방의 일부가 통로가 된다.

저 멀리까지 시야에 들어는 통로 전체가 그야말로 만원 버스였다. 사람들은 스텝 맞추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첫 번째 방도 사람들에 떠밀려 돌파

다음 방에서도 돌파

그다음 방에서도 돌파..


내가 걷는 게 걷는 게 아니었다. 마치 무빙워크를 탄 듯 모든 사람이 같은 속도로 자동 전진했다. 하지만 언젠가 인구밀도가 좀 줄어드는 구간이 있겠지-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떠밀리다 보니 어느덧 거울의 방 마저

돌파...



아까 그 안전요원은 분명히 이렇게 말했었다.
"처음엔 사람들 좀 밀리다가 차츰 괜찮아져."


하지만 거울의 방도 이렇게 허무하게 닝겐들 뒤통수에 시야의 반을 빼앗긴 채 지나가 버리고 이후에도 이 강제 무빙워크는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좀 이상했다.

내가 베르사유 궁전 사전조사랍시고 찾아본 수많은 블로그의 사진들은 이렇지 않았다. 대부분 여행 성수기 여름에 찍은 사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붐비지는 않았는데 이 닝겐들은 갑자기 어디에서 왜 등장한 것인가.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인가?


그렇다. 복도는 헬 돋데기 시장이더라도 방의 반대쪽은 바리케이드가 쳐 있어 접근 불가이므로 카메라를 복도 반대쪽으로 돌려 찍으면 이런 평화로운 사진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20180721_16380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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