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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SAILING Dec 05. 2021

섬 친구들의 마지막 인사

Centro Velico Caprera

"거긴 지금도 똑같을 거야.. 일단 섬에 들어가면 완전히 세상으로부터 격리돼서 낮엔 배 타고 밤엔 연애질 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지." 


세일링을 딩기부터 배우는 게 좋다는 말에 이미 다른 세일링 스쿨에서 일주일 합숙훈련을 마치고 돌아왔건만, '좀 배우고 오라'는 고용주에 의해 또다시 2주간 무인도로 보내졌습니다. 

매주 토요일 단 한번 입소생들과 출소생들을 옮기는 왕복선 이외엔 대중교통이 없고 국립공원이라 외부의 배들도 접근할 수 없는 진정한 무인도 카프레라. 이곳엔 옛 이탈리아 해군의 막사를 숙소로 사용하는 세일링 스쿨 하나와 세일링 요트들만 있습니다. 

아름다운 바다와 척박한 땅, 카프레라


'라떼는' 여기저기 굴러다녔다던 연애질용 매트리스는 없었지만, 막사에서 배 있는 곳까지 땡볕에 플립플랍을 신고 십여분 걷는다는 기나긴 흙길이나 이탈리아에선 흔치 않은 터키식 변기 위로 샤워꼭지가 있는 무시무시한 화장실 등은 듣던 그대로였습니다. 

떼 지어 수다 떨며 걸어가곤 하던 흙길
발 조심해야 하는 세면대


다른 세일링 스쿨과 다른 독특한 문화를 가진 학교였습니다. 강사들은 모두 이 학교 출신이되 평소엔 본업에 종사하다가 학교가 문을 여는 시즌에만 섬에 머물며 세일링을 가르칩니다. 교통비 정도만 지원받고 무료로 재능기부를 하는 형태인데도 많은 수련생들이 이 자격을 얻기 위해 쉽지 않은 강사 코스를 밟곤 했습니다. 

사는 곳은 달라도 매년 여름 섬에서 모이기에 그들끼리 친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군대처럼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있어 코스 책임 강사는 수련생들 뿐 아니라 보조 강사들에게도 지시를 했죠.

수련생과 강사들


분명 적지 않은 수강료를 내는데도 돌아가며 '주번'을 서야 하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청소는 청소부에게 맡기는 이탈리아 문화에서 수련생에게 청소와 요리 등의 잡무를 시키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한 차례 자기 순서가 돌아오면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남들 세일링 하러 나가는 시간에 숙소를 청소하고 점심과 저녁을 준비하느라 땅에 남아야 했습니다. 

아침 준비를 마친 주번들


주번이 아닌 수련생들은 아침에 식당 앞에 모여 노닥거리다 종이 울리면 우르르 몰려 들어갑니다. 설거지가 편한 플라스틱 사발 가득 채운 커피와 어제저녁 남은 굳은 빵으로 아침식사를 합니다. 칠판이 있는 곳에서 잠깐 이론을 배운 뒤 배가 있는 해변까지 흙길을 걸어 걸어갑니다. 

오전 세일링을 마치고 또다시 흙길을 걸어 본부로 돌아오면 아프리카 출신 주방장 마마두가 주번들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점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학생들도 무리 없이 삼 인분씩 순삭 하고 1분 1초가 아까운 휴식 시간을 가진 뒤 또다시 땡볕 아래 흙길을 걸어 배가 있는 해변으로 돌아갑니다.


오후 세일링을 마치면 또다시 흙길을 걸어 걸어 본부로 돌아옵니다. 순서를 기다렸다 발밑의 더러운 변기에 주의하며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은 뒤 마무리 칠판 수업을 합니다. 그날의 세일링을 리뷰하고 질문하고 개선점을 논의하죠. 그리고 다들 바다가 보이는 식당 앞 바닥에 주저앉아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하며 놀다 소등 시간 전에 도미토리 침대로 돌아가 잠이 듭니다.




일주일이 무사히 지나가고 이주 차에 접어들자마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딩기 요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배가 뒤집어지기에 몸이 공기 반 물 반에 있게 되는데 한 달에 한 번 그날이 시작한 겁니다. 체내형 생리대를 준비해 가긴 했으나 배가 뒤집히며 물에 내동댕이쳐질 때마다 불안하던 중, 하루는 오후 세일링이 다섯 시간이나 이어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항상 '함께' 움직여야 하기에 먼저 땅으로 돌아가는 것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본부로 돌아가는 흙길부터 이미 상태가 좋지 않더니 그날 밤부터 고열이 시작됐습니다. 

다음날 아침, 책임 강사는 숙소에 남아 휴식을 취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함께 해변까지 가서 그 앞의 세일 창고에 누워 쉬라'고 지시합니다. 그 상태의 몸으로 또 그 긴 흙길을 걸어가 세일 더미 위에 몸을 눕히고 몇 시간 뒤, 수련생들이 땅으로 돌아올 때쯤 이미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습니다. 그제야 권위적인 20대 책임 강사는 수련생 중에서 의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통제적이고 강압적인 코스 책임 강사와 카프레라의 수직적인 문화에 이를 갈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했지만 결국 그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카프레라에 갔습니다. 

사실 이 학교의 군대적인 문화는 그 탄생에서 유래합니다. 엄격하게 관리되는 국립공원 안에 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 해군 기지를 가지고 있던 이탈리아 해군이 설립 주체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프랑스의 유명한 세일링 학교 글레난(École des Glénans)을 본떠 카프레라의 시스템을 만든 실질적인 '창조자' 귀도 콜나기(Guido Colnaghi)의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성기를 든 귀도 콜나기
바람이 많으면서 바람 피할 곳도 많은, 무엇보다 육지에서 접근이 불가능한 스파르타식 험블한 장소를 찾아다녔다. 카프레라에 다녀오고 나서 우리는 약간의 조급함과 큰 희망을 품게 되었다. 
Cercavamo un luogo spartano, ventoso, pieno di ridossi e soprattutto inaccessibile da terra. In quella trasferta a Caprera tutti noi riponevamo qualche ansia e grandi speranze. 


본업은 회계사였던 귀도는 이탈리아 크로스컨추리 챔피언이었고 열정적인 세일러였습니다. 1967년 사르데냐 북쪽의 무인도 카프레라에 학교를 세우고 나서는 세일링 교육에 헌신했습니다. 카프레라 초기 강사들을 육성하고 본인도 직접 바다에 나가 확성기를 들고 수련생들을 지도했죠. 이제 누적 450명이 넘어간다는 강사들은 대에 대를 이어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무료로 카프레라 후배들에게 세일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귀도는 '카프레라 수련생 연합(AIVA)'이라는 조직도 설립합니다. 이탈리아 주 별로 AIVA 지부가 존재하고 매년 11월 첫 주말, 전국 지부가 모여 연례 레가타를 합니다. 카프레라에서 바다와 세일링을 배운 수련생들은 AIVA로 섬이 이어준 인연의 끈을 이어가죠. 카프레라 초반에 학교를 다닌 70대부터 갓 코스를 마친 10대까지, 전 세대를 이어주는 공통의 열정 - 세일링 - 으로 뭉친 수련생들은 낮엔 배에서 경쟁을 하고 저녁엔 축제를 벌입니다.

AIVA 레가타 중 샌드위치를 먹는 졸업생들


그래서인지 고려대학교 교우회, 해병대 전우회, 호남향우회 못지않은 '졸업생들의 끈'이 있기도 합니다. 우연히 제3의 정박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함께 수다라도 떨다 '카프레라 출신'임이 밝혀지면 금세 '우리가 남이가' 관계로 도약합니다. 잘못하면 샤워하다 똥 밟는 스파르타식 막사와 기나긴 흙길, 매일 대면해야 했던 체력의 한계 등을 함께 추억하면서요. 


이 역시 이탈리아답지 않은 독특한 문화인데 이것도 귀도의 설계였을까요? 

말로만 듣던 귀도는 수년 전 AIVA 창립 50주년 기념 레가타 저녁 행사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농담과 반어였던 90대의 귀도와 수련생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저를 카프레라에 보냈던 고용주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교육용 딩기 아이디어가 있으니 언제 한번 집으로 찾아오라 초대했는데 미루다 미루다 귀도의 부고를 접하는군요. 


이제 누적 2500명을 훌쩍 넘는다는 카프레라 수련생들의 애도와 추억이 물결을 이룹니다. 계속해 세일링을 하든 그렇지 않든 외딴섬에서 오로지 바다와 세일링만 함께 하던 시간들은 특별한 경험으로 남아 수련생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이제 귀도는 곁에 없어도 카프레라는 앞으로 50년 100년 뒤에도 바다와 세일링을 가르치며 사람들이

"거긴 지금도 똑같을 거야.."라고 추억하는 곳이 되지 않을까요?




2주간의 코스가 끝나고 학생들은 강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장기자랑을 준비하고, 강사들도 학생들을 위한 공연을 했습니다. 

세일링 중에 겪는 각종 애환을 코믹하게 엮어 개사해 부른 노래의 제목은, 

'A caprera tornerai(넌 카프레라에 돌아올 거야)'

하지만 넌 알지, 카프레라에 돌아올 거라는 걸!



https://www.facebook.com/CentroVelicoCaprera/?hc_ref=ARROBQwqTcn2NJ22RlOaj03gDApBRjxBHTq6U3jlE6Z0QEBPorX1aJ5RBvSzGSsLz0s&fref=nf&__tn__=kC-R

http://www.saily.it/it/article/addio-guido-colnaghi-un-romanzo-con-la-ve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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