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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SAILING Jan 10. 2019

밀라노 진짜 럭셔리

Museo Poldi Pezzoli

밀라노의 명품거리라 하면 Via Montenapoleone가 상징적이지만 실제로는 그와 이웃한 Via della Spiga, 그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길들이 다 명품 '구역'이라고 할수 있다. 밀라노 두오모와 가까운 San Babila 쪽 입구에서 시작해 이 길들을 순례하다 보면 아르마니 호텔이 있는 Via Manzoni에 이르게 된다. 화려한 쇼윈도에 넋을 잠시 대여해 준 채로 걷다가 처음으로 인도를 가로막는 차도를 마주하게 되므로 대체로 이 부근에서 정신이 들게 마련이다. 대부분 잠시 되찾았던 넋을 되돌려주러 나온 구역으로 되돌아가거나 굳은 마음을 먹고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곤 한다. 몬테나폴레오네 역에 들어가기 전, 고개를 들어 거리 풍경을 한번 더 눈에 담아 본다. 사람들은 쉬크하고 길 따라 정렬한 석조 건축물들은 남성적이고 웅장하다. 아마 대대로 귀족들이 살던 집 - 프랑스처럼 혁명으로 뒤집어진 적 없는 이태리에선 아직 그들의 집일 수도 있다. 막상 이태리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 '명품'들을 찾아 이 먼 곳까지 쇼핑을 온 사람들이 그 명품들의 정신적 고향인 이런 귀족들의 저택을 구경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런데 이 길의 석조건물 중 하나가 박물관으로 대중에 개방되어 있다.


대대로 살던 귀족의 저택이 시나 비영리 재단 등에 기증되는 경우 기증품에 집 뿐 아니라 가구, 장식품, 예술품, 때로는 생활집기가 포함되기도 한다. 이를 양도받은 단체는 복원과 관리의 책임을 진다. 공익성이 있을 경우, 혹은 기증자의 희망에 따라 일반 시민에게 공개하기도 한다. Via Manzoni 12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Museo Poldi Pezzoli도 이 중 하나이다. 집주인 Gian Giacomo Poldi Pezzoli는 19세기의 유명한 예술 수집가였다고 한다. 가족 대대로 내려오던, 그리고 본인이 평생 수집한 중요한 예술품이 많아 기증된 그의 집은 이 작품들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컬렉션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15세기 피렌체 엘레강스의 결정판이라는 Piero del Pollaiolo의 '젊은 여인의 초상'. 박물관의 로고이기도 하다.

이 젊.여.초 시리즈는 총 네 개의 그림이 있는데 각각 밀라노, 피렌체, 뉴욕, 베를린에 흩어져 있다. 광활한 갤러리 벽을 채운 수많은 그림들 사이에 있을 다른 셋과 이 그림은 보는 느낌이 사뭇 다르리라 생각된다. 뭔가 미스테리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 젊은 여인은 거실 한 구석에 조용히 걸려 있다. 집에 이런 그림을 두고 일상을 함께 하는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진다. 집쥔 잔 자코모씨는 때로 거실 한 가운데 서서 이 여인을 응시하기도 했을까?

이 집엔 폴라이올로 뿐 아니라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보티첼리, 라파엘로, 티에폴로 등 거장의 작품들이 있다고 하지만 방에서 방으로 이어진 공간에서 그림을 보면서 막상 그림 이름은 보지 않게 된다. 워낙에 본인이 열혈 미술 수집가여서 그림을 전시하게 좋게끔 집을 개조했다는 집쥔 잔 자코모 아저씨. 그림을 사거나 배치할 때는 실내공간과, 그리고 다른 그림들과 어울리는가를 꽤나 고려했을 것이다. 물론 박물관이 된 지금은 새로운 큐레이터가 배치를 바꿨겠지만 이 그림들엔 여전히 주변과의 강한 연결고리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림 하나하나보다 공간 안에서의 그림을 보게 된다.


19세기 귀족 잔 자코모 아저씨의 컬렉션 구성을 보는 재미도 있다. 주로 르네상스 그림이 많지만 방 하나를 가득 채운 엄청난 시계 컬렉션이나 이런 것도 수집하는 게 유행이었나 싶은 천체 관측 기구들, 전시 공간이 없었는지 클락룸 쪽 구석진 서랍들에 숨어 있던 텍스타일, 벽을 뚫고 유리장을 만들어 전시한 도자기 등 다양하다. 눈에 띄는 점은 중세 미술의 비중이 상당했다는 것이다. 요즘에 누군가 중세 미술 수집가라고 하면 저 사람 엄청난 부자이구나 생각해도 틀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세월이 가장 많이 흐른 작품들이므로 개인이 거래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그림들의 희소성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저 당시에도 이 법칙이 유효할 지 궁금하다. 아니면 대대로 물려받은 그림들일 수도 있겠다. 마치 물려받은 저택의 고급 고가구들이 지겹긴 한데 버리기도 안전하게 보관하기도 어려워 울며 겨자먹기로 쓰는 것과 같은 케이스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역사가 긴 귀족 가문이라 물려받아야 하는 중세 예술이 많았을지도...


어느 방 한 구석엔 메멘토 모리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모여 있다. 해당 주제에 관한 책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젊은이의 초상 액자 뒷면에 숨겨진 해골 그림은 전형적이다. 아치 모양 상자의 양쪽 문엔 수태고지, 상자를 열면 안쪽에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 그런데 뒷면은 해골이 그려진 나무 상자는 그보다는 좀 덜 식상하다. 

집쥔 잔 자코모 아저씨는 거물 지주 아버지와 밀라노 최고 명문가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만으로 스물 넷, 성인이 되자마자 엄청난 유산을 받아 유럽을 여행하고,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고, 아트 콜렉터가 되어 예술적인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곤 했다. 새삼 이런 사람에게 있어 메멘토 모리란 어떤 의미였을까 궁금해진다. 죽음을 피할수 없는 일개 인간으로서 겸허해야 함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아님 이 또한 보여주기 위한 지적 허영이었을까?


2층 올라가는 계단과 분수
무기의 방 안쪽 벽에 정렬한 갑옷들


그러나 이 박물관에서 젊.여.초 다음으로 유명한 컬렉션은 역시 무기 컬렉션이다. 1층 매표소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관람의 시작점이 되는 '무기의 방'은 집쥔이 평생 열정을 가지고 모은 갑옷, 창, 방패, 총 등의 무기들로 꾸며져 있다. 어두운 조명 아래 투구가 갑옷 어깨 위에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 여러 갑옷들이 정렬한 방 안쪽 벽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이 웅장하고 멋있다. 마치 갑옷 안에 군인들이 말없이 서 있는 느낌이다. 방 중앙과 양 측면을 가득 채운 유리장에는 앤틱 무기들의 컬렉션이 펼쳐져 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다.


디자이너로서 재미있게 본 부분은 잘 보존된 집의 여러 디테일들이다. 한쪽은 나무 부조, 다른 한쪽은 가죽을 덧댄 문이나 백년이 훌쩍 넘었을 손잡이들, 기계로 뽑은 게 아니라 무두질로만 나올 수 있는 금속 디테일 등. 더불어 전시된 가구의 양도 상당히 많아 말 그대로 '오리지날 이탈리안 가구'의 원본을 볼수도, 이들이 어떤 실내 환경과 어울려 쓰였을지도 상상할 수 있다.


잔 자코모씨는 사망 18년 전 미리 작성한 유서에서 이미 밀라노 미술 학교에의 기부를 명시 했다고 한다. 이 집과 그 안에서 그가 창조한 세계가 진정한 예술 재단이 되어 대중에게 영원히 유익한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램으로. 그의 사후 2년만에 이 집은 박물관으로 일반인에 공개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게 진정한 럭셔리의 클라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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