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법전 아래 흐르는 ‘1도의 진심’

매뉴얼엔 없는 문장, “할머니 잘못이 아니에요”

by 김순경

경찰학교에서 우리는 무수한 매뉴얼을 외운다.

상황별 대처 요령, 관련 법조항, 물리력 사용의 범위까지

그 종이 위에는 감정이 섞일 틈이 없다.

법은 언제나 명료하고 차갑게 선을 긋는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나는 삶은 결코 선명하지 않았다.

사건 번호로 불리는 일들 뒤에는, 매뉴얼이 결코 담아내지 못하는 '사람의 온도'가 있었다.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발소리만 들어도 안다.

절박함이 공기를 짓누를 때, 그건 대개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발걸음이다.

허겁지겁 달려온 할머니의 손등은 거칠었다.

평생 흙을 만지며 살아온 흔적.

막내 자식 결혼 자금으로 쓰려고 한 푼 두 푼 모았다는

2,000만 원은 전화 한 통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할머니는 돈을 잃은 슬픔보다 자신을 향한 분노로 몸을 떨고 계셨다.

“내가 바보지, 내가 죽일 년이지…그걸 왜 속아 넘어가서...”


법의 매뉴얼은 냉정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

악성 앱이 깔렸는지 확인하고, 은행에 지급 정지를 요청하고, 피해 사실에 대한 진정서를 작성하는 것. 거기까지가 경찰관으로서의 공식적인 ‘업무’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 스스로를 할퀴며 자책하는 할머니를 두고, 서류 몇 장으로 상황을 종결짓기엔 내 마음의 온도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순경이라는 계급장 대신, 할머니의 막내아들이 되기로 했다.

“할머니, 할머니 잘못 아니에요. 나쁜 놈들이 작정하고 속인 거지, 어떻게 할머니 탓을 해요.

자식분들도 절대 할머니 탓 안 할 거예요.”

단순히 업무적인 절차를 넘어서고 싶었다.

내 할머니의 일이라 생각하니 손가락이 바빠졌다.

휴대폰을 샅샅이 뒤져 숨어있는 악성 코드를 찾아내고, 혹시 모를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은행 상담원과 직접 통화하며 끝까지 확인했다.

다행히 발 빠른 대처로 더 이상의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파출소 문을 나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는데, 안도가 아닌 미안함이 먼저 밀려왔다.

법은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리는 데는 서툴렀고, 사라진 2,000만 원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채 공중에 떠 있었으니까.

그때 할머니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셨다.

그리고는 붉어진 눈시울로 내 손을 다시 한번 꼭 쥐셨다.

“젊은 경찰관님, 너무 고마워... 덕분에 더 안 나쁘게 끝났어. 이제야 내 마음이 좀 살 것 같아.”

울컥함이 섞인 그 투박한 인사는 그 어떤 훈장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할머니가 고마웠던 건 내가 찾아낸 악성 앱이나 정지시킨 계좌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 굽은 어깨를 다독였던 내 서툰 진심에 할머니는 비로소 ‘자책’이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오신 게 아닐까.

법은 범죄의 유무를 가리지만, 사람은 그 뒤에 남겨진 삶의 온기를 가린다.

매뉴얼대로라면 나는 그저 서류를 작성하고 다음 신고를 기다려야 했겠지만, 나는 그날 매뉴얼 밖에서 온도를 1도 더 높이는 법을 배웠다.

차가운 법과 뜨거운 눈물 사이. 그 사이 어딘가에 내가 서 있어야 할 진짜 자리가 있다는 것을, 할머니의 젖은 목소리가 내게 가르쳐주었다.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