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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Mar 23.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26

한식


참을 수 없는 위장의 가벼움과 참아 줄 수 있는 한식의 값어치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을 다녀온 날은 그 허허로운 기운을 용케 참아낼 수 있었다. 위대한 화가들의 예술혼에 담뿍 적셔진 채 싸구려 까바 와인에 갈리시아 지방 감자칩만으로도 그날의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또 다음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뱃속이 꼬이는 게 느껴졌다. 당연히 레지던스의 식사는 훌륭하다. 14.9유로로 책정된 메뉴 델 디아(오늘의 정식)는 1식, 2식, 디저트에 하우스 와인 한잔까지 포함하는 매우 훌륭한 스페인 가정식을 제공한다. 레지던스에 초대받은 입주작가인 나는 그 모든 끼니와 음료 한잔이 무료이기에 이런 대접을 하루 두 끼 제공받는다(조식은 간단한 호텔식 뷔페). 그럼에도 며칠 전 밤거리에서 바로 그곳을 목격한 뒤로는 더 이상 이 새로운 종류의 허기를 가둬놓을 수 없게 되었다.


레지던스의 메뉴 델 디아. 무려 송아지 카르파치오!



며칠 전 맥주를 사기 위해 스페인 총각을 따라 뒷골목을 지난 적이 있었다고 밝혔다. 골목길의 작은 구멍가게에서 맥주를 사고 그와 안녕한 뒤 돌아가는 길에 잠시 밤길이 예뻐 부근을 쏘다니게 되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어느 가게의 입구, 그 입구에는 익숙한 고향의 문양들과 기와가 보였다. 한국식당이었다. 이름은 고려정. 순간 기다렸다는 듯 김치찌개 냄새와 부침개 익는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하는 듯했고 입속은 신김치의 공격에 상처 받은 듯 혀끝에서부터 피 같은 침이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참을 수 없는 한식의 유혹! 급한 대로 나는 내 가방에 맥주가 있고 숙소에는 고추참치 통조림과 조미김, 참이슬이 있다는 것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며 겨우 그곳에서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사실 고려정 이곳의 존재는 레지던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알아챈 바 있다. 국적기에서의 비빔밥 사태(2편 참조) 이후 초기 적응 중 불현듯 떠오르는 한식에의 집착으로 인해 레지던스 주변 한식당을 검색해보았던 것이다. 다행히 검색을 한 것만으로도 한식에 대한 집착은 가라앉을 수 있었다.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한식당이 있으니 언제든 가서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 내게 여유를 주었던 것. 하지만 며칠 전 그 검색의 결과이자 내게 한식에의 안전핀이 되어주었던 고려정을 직접 목격하고 나니, 참을 수 없는 한식에의 유혹이 침샘을 농락했고... 결국 이곳에 가는 것이 나에게는 치유이자 의무이자 수행과제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이미 마드리드에서 두 달 열흘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실로 한식을 한번 먹어주어도 될 최적의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마드리드에 온 지 한 달 안에 먹는 건 너무 빠르게 느껴지고 두 달 안에 먹는 것 역시 참을성이 부족해 보이며 석 달이 다 되어가는 두 달 스무날 즈음에는 곧 귀국해 먹을 한식을 열흘 남기고 먹는다는 점에서 간절함이 떨어지는 기분인 것이다. 두 달 열흘 즈음인 지금이야말로 한식당에 갈 수 있는 명분과 실리가 가장 적절한 때인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한국 아재의 식욕 담당 중추였다.


그곳을 목격만 안 했어도 안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왕지사 목격한 것, 이것도 인연인데 어이구 고추기름 떠 있는 순두부에 밥도 말아먹어야죠. 부침개는 혼자 부담스러우니 잡채 작은 접시에 녹색병도 한잔 하면 좋구요. 한식당이 아무리 비싸도 혼자서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어요, 그래도 한국 음식 먹고 나면 지금의 이 허무한 기분도 허기진 한식 욕구도 허허로운 몸 상태도 회복되겠죠. 내가 맨날 한식을 찾는 게 아니라 마드리드 와서 경험 삼아 타이밍 좋게 한 번 먹어보는 게 딱히 문제 될 건 없겠고요, 예전에 외국에서 한식 집착하는 거 별로라고 쿨한 척 굴던 오만에 대한 반성으로다가 한식을 먹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참회가 아닐까 하온데요.


마드리드 한식당. 고려정.



그리하여 나는 평일 오후 늦가을 낙엽이 푸짐한 마라뇽 광장을 지나 누에보스 미니스트리스 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날은 적당히 차고 속은 비어 몸도 가벼운 게 무언가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면 딱 맞는 상태였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휘파람을 부르며 한국음식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준비가 되어갔다. 고려정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마드리드 최초의 한식당이라고 한다. 시내 방면에 있는 몇몇 한식당과는 다르게 관광지에서 벗어난 곳에 자리를 잡았고 구글 평점도 4.4였다. 리뷰도 외국인이 다수였고 한국인 리뷰는 대부분 ‘짜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나는 짜고 매운 음식이 그리워서 그곳에 가는 거였기에 그런 평가에도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2시 반 경 도착한 고려정에는 척 봐도 중국인임이 분명한 남자 직원 두 분이 서빙을 보고 계셨다. 아늑한 실내에 이미 자리가 찬 두 테이블은 스페인 분들로 보였고, 그중 한 테이블은 제대로 고기를 구워 쌈을 싸 드시고 계셨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 한국말이 적힌 메뉴판을 받아 든 채 느긋하게 메뉴를 살폈다. 두 가지 메뉴를 주문하기로 마음먹은 채 계속 조합을 맞춰봤다. 일단 순두부찌개와 된장찌개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결국 순두부찌개가 그 매콤함에 대한 기대치로 인해 선정되었다. 그리고 닭갈비와 불고기가 머릿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해대다가 김치볶음밥으로 결정되었다. 왜죠? 사실 레지던스 식사에서 고기는 많이 먹었다. 김치와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다니! 거기다가 김치볶음밥 사진이 너무 먹음직스러워 그대로 지나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한편으로 두 가지 음식에 녹색병까지 하자면 금액도 만만치 않기에 고기 메뉴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김치볶음밥이 다크호스로 치고 올라와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었다.


주문을 하고 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 무리의 스페인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 단체손님. 단체석에 앉은 분들은 신 정부 청사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러 온 공무원들 같아 보였고 한식 파티를 벌이듯 이것저것 상의하며 주문을 했는데, 그 광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또한 스페인 총각 하나가 혼자 들어와 테이블 하나를 채워주었다. 단체 포함 다섯 테이블 중 나를 제외한 테이블이 모두 스페인 사람이었다. 게다가 서빙하는 종업원 두 분은 중국분임이 거의 확실시되었기에 식당 홀에는 한국식당임에도 나만이 유일한 한국인인 셈이었다. 관광지 한식당에는 상대적으로 한국인이 많을 텐데 여기서 나 혼자 한국인으로 현란한 젓가락 드리블을 보이자니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려정. 한식당을 능숙하게 이용 중인 마드릴레뇨들.



중국 억양이 담긴 “서비씁니다.”라는 말과 함께 채소가 깔린 접시에 간장을 머금은 연두부가 등장했다. 오! 예상치 못한 서비스에 감탄하기도 전에 이미 손은 수저질을 하고 있었다. 두부가 이렇게 고소했었나? 간장이 이렇게 달콤했었나? 나는 자동반사로 소주를 시켰다. 자고로 주당은 반찬으로 반 병은 까고 시작해야 하기에 두부 서비스 반찬에 곧바로 소주를 시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소주 역시 한 잔 들이켜자 뱃속이 찌릿한 게 녹색병의 마력이 위장을 채워주었다.


신선한 두부 샐러드를 안주로 주섬주섬 삼키며 만족해할 찰나 김치볶음밥이 나왔다. 오! 이 빨갛게 빛나는 수천 개의 영롱한 밥알이여! 나는 두부 반찬에 김가루가 올려져 있는 김치볶음밥을 안주로 소주를 음미했다. 캬아. 부산영화제에 온 외국 영화인들이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들었다. 그들은 한국 소주를 기다렸다는 듯 마신 뒤 이것이 바로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마시면 진실을 말하게 된다는 녹색병이 맞나고 묻는다고. 암. 녹색병을 마시면 진실을 말할 수 있다. 물론 진실만을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거기에 더해 진실을 토해낼 수도 있다. 자기가 먹은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는 진실 말이다.


김치볶음밥은 짰다. 그래서 좋았다. 뭔가 김밥천국의 레시피를 따른 듯하면서도 그보다는 고급진데 집에서 해 먹는 김치볶음밥과는 좀 느낌이 달랐고, 스페인이어서 그런지 빠에야의 느낌도 조금 드는 것이 여러 가지로 독특한 김치볶음밥이었다. 하지만 내겐 김치와 밥이 버무려진 것이면 충분했다. 김치볶음밥을 몇 수저 뜨고 나니 순두부찌개가 등장했다. 예상치 못한 두부 서비스에 순두부가 중복된 감은 들었으나 이 뻘겋고 뜨거운 국물이야말로 오늘의 하이라이트이자 클라이막스이고 화룡정점이 아닌가! 나는 지금 마드리드의 한식당에서 국물에 소주를 마신다. 빨간 국물과 녹색 병에서 나온 투명한 물이 나를 한국의 들판에 풀어놓는다. 이것은 한식 예찬이 아니다. 이것은 이국에서의 고립감과 객지 생활의 고단함에 지친 한 중년의 한국인에게 긴급 처방된 치료식과 링거일 따름이다.


뭔가 어설프지만 맛은 좋았던, 고려정의 김치볶음밥.



최대한 시간과 공을 들여 음미하며 먹으려 했지만 다 먹고 나니 오후 세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삼십 분. 삼십 분 남짓 동안 정신없이 한식을 먹었으나 소화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주변의 스페인 손님들은 현란한 젓가락질로 빠르게 한식을 섭렵하는 나를 훔쳐보곤 했는데, 부디 그들이 한식을 한국사람처럼 먹으려면 최대한 빨리 흡입해야 하는 거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과나 수정과 등으로 구성되었을 디저트는 바로 패스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대 맞은편에 신동우 화백이 그린 그림이 있었다. 한 선비가 막걸리를 마시고 있고 주모가 있고 그에 어울리듯 갓을 쓴 한복 차림의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한국의 맛을 즐기는 그들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순간 잘도 소화되던 밥알들이 위장에서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돈키호테를 쫓다가 보니 어느새 내가 그에게 쫓기는 듯했고, 그 곤란에 한식당으로 도망쳐오니 이곳에서조차 돈키호테가 나를 쫓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레지던스의 책상 앞을 향해 복귀해야 했다.


신동우 화백님의 돈키호테. 고려정.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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