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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Mar 25.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27

특강 上


Ainhoa Sanchez로부터의 메일 한 통이 불러온 보람찬 계획



숙소로 돌아와 돈키호테 구상에 몰입했다. 글 쓰는 시간보다 구상하는 시간은 늘 더디고 지난한 과정이다. 내 머릿속에 이야기의 지도가 있어서 지도 속 길을 모두 걸어보고 나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가보지도 않고 그 길에 대해 쓴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큰 일이다. 나는 이제 쓰지 않고도 머릿속에서 내가 그린 지도 안의 길을 쏘다닐 수 있다. 다만 내 지도가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지도이냐 하는 점에 늘 의문을 품은 채 길을 간다. 그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인생처럼 이야기에게도 답안지 같은 지도는 주어지지 않으니까.


한식을 먹고 기운 차린 후 한식당에까지 따라와 나를 지켜보는 돈키호테의 시선에 기겁한 뒤 며칠 동안 구상한 내용을 정리하고 또 재구성했다. 내가 써야 할 이야기라는 코끼리를 눈먼 자의 손으로 더듬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수확의 계절 가을도 다 끝나가고 나만의 돈키호테 이야기를 찾아 마드리드에 온 지도 두 달 보름이 되었다. 이제 보름 남은 이곳에서의 시간 동안 내가 쓸 돈키호테 이야기도 조금씩 무르익고 있었다.


한 달 간의 적응과 세르반테스 쫓기, 이후 다시 한 달 간의 구상과 <돈키호테> 탐독, 다시 남은 한 달 동안 내 안에서 일어나는 돈키호테 이야기의 숙성. 한국에 돌아가도 이곳에서의 경험과 이곳에서 잉태된 이야기는 나를 계속 행진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남은 보름도 허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며 그간의 근황을 토지문화재단에 보고하기 위해 메일을 열었다. 그런데 새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Ainhoa Sanchez의 메일이었다.


Ainhoa Sanchez는 토지문화재단과 함께 이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만들고 진행하는 AC/E(스페인 문화국)의 담당자다. 그녀와는 한국에서부터 레지던스 관련 사항을 메일로 나눈 바 있고 이곳에 오고 나서도 마드리드 무사 도착을 알린 바 있다. 당시 그녀는 답신에서 마드리드에서의 행운을 빌며 언제 한번 만나자는 말을 덧붙였다. 나 역시 그녀를 한번 만나야지 했으나 마드리드에서 적응하고 돈키호테를 쫓느라 미팅은 차일피일 미뤄졌던 것이다. 그녀의 메일을 열었다. 역시나 늦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만나자는 메일이었다. 뒤이어 몇 가지 정보가 더해졌는데 그것은 자신이 마드리드 꼼쁠루뗀쎄 대학교의 한국어 수업을 주관하는 정미강 교수란 분을 최근 알게 됐으며, 그분도 같이 만나 셋이 이야기를 나누면 우리가 무언가를 도모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매우 흥미로웠다.


1) 그간 이메일로만 소통해 온 Ainhoa Sanchez를 직접 만나 반가움과 감사를 나누고,


2) 한국 교수님을 만나서 모처럼 한국말로 수다를 떨 수 있게 되었다.


3) 그리고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한국어 수업에서의 특강이 아니겠는가.


4) 그렇다면 스페인 대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이고 그곳에서 나는 스페인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돈키호테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5) 무엇보다 Residencia de Estudiantes의 입주 작가로서 한국문학과 문화에 대해 스페인 대학생들에게 알려주는 보람 있는 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며칠 뒤 약속이 잡혔고 나는 레지던스에서 걸어서 25분 정도 걸리는 까날 역 부근의 AC/E까지 걸어갔다. AC/E의 멋진 사무실로 안내받은 나는 그곳에서 큰 키에 총명한 눈빛이 빛나는 Ainhoa Sanchez를 '드디어'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작은 선물인 북마크를 고맙게 받은 뒤 돈키호테에 대해 많이 조사했냐고 물었다. 나는 실어증에 걸린 사람이 말문이 터지듯 그녀에게 그간 돈키호테를 쫓아 말라가와 세비야, 알칼라 데 에나레스까지 사방팔방 다닌 일을 털어놓았다. 이에 격려라도 하듯 그녀는 내게 책 두 권을 선물로 주었다. <Miguel de Cerveates: la vida al mito>, <Miguel Cervantes: El retablo de las maravillas> 모두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에 관한 것이었는데, 앞의 것은 ‘전설의 인생 세르반테스’라는 제목으로 그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이었고, 뒤의 것은 세르반테스에 대해 스페인 카투니스트 두 명이 콜라보로 작업한 카툰집이었다. 둘 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책인 듯했고 내 작업을 배려한 그녀의 선물이라 생각하니 저절로 ‘무챠스 그라씨아스’가 터져 나왔다.


<전설의 인생 세르반테스> 세르반테스 일대기


<미겔 세르반테스> 세르반테스 일대기 카툰 : 적어도 카툰집은 더 쉽게 볼 수 있다는...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는 즈음 발걸음이 들리더니 정미강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우리는 보자마자 서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나눴다. 나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정교수님은 Ainhoa Sanchez와 스페인어로 인사와 안부 기타 등등을 매우 빠르게 소통해 나갔다. 스페인어는 문장이 긴 편이라 말을 빨리들 하는 편인데 정교수님은 현지인 모드로 엄청난 스페인어를 구사하며 Ainhoa Sanchez와 이야기를 나누셨다. 나는 잠시 멍하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야 했다. 이윽고 우리는 세 명 다 가능한 영어로 돌아가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나눴다.


정교수님 역시 Ainhoa Sanchez를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사연인 즉 Ainhoa Sanchez가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정교수님의 꼼쁠루뗀세 대학의 인문학부 학장을 만나게 되었고, 학장에게 한국어 수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한국 작가가 스페인 레지던스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었다. 그래서 학장은 정교수에게 한국 작가에 대한 존재를 알려주었고, 우리는 이렇게 함께 만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보름 뒤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조금 더 일찍 우리가 만났다면 좀 더 다양한 기획을 나눌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정교수님의 학생들을 비롯한 교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는 게 가장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강일은 바로 다음 주. 어라.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나는 수락을 하고 어떤 특강을 준비할지 즉시 고민에 들어갔다.


한국에서도 여러 번 특강과 강의를 진행한 적이 있다. 작가와의 만남, 도서관, 서점 행사, 선배가 재직 중인 고등학교, 모교 인문학부, 카이스트 학생 대상 워크숍, 수원영상미디어센터 시나리오 워크숍, KBS 인재원 워크숍까지... 그간 작가의 삶, 신간 관련 특강, 스토리텔링 작법, 시나리오 쓰기 등 여러 방면으로 강의를 해왔다. 강의는 독자들과 수강생들을 만나는 자리이자 내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짭짤한 수입인 강의료를 벌 수 있는 찬스이기도 했다. 그래서 작가가 된 후 제의가 들어온 강의는 크게 구애받지 않고 수락한 편이었다.


그리고 이제 외국에서 통역과 함께 이뤄지는 인생 첫 강의가 펼쳐진다. 바로 다음 주! 흥분과 기대와 부담이 3:5:2의 비율로 내 머릿속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게 특강을 합의한 후 Ainhoa Sanchez와 인사를 나누고 정교수님과 함께 건물을 나섰다. 교수님은 다음 주 특강을 할 장소에 한번 가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고 나는 흔쾌히 그녀의 빨간색 소울에 동승했다.


마드리드 국립대학교, 정식 명칭 Universidad Complutense Madrid(마드리드 꼼쁠루뗀쎄 대학교)는 쉽게 말해 스페인의 서울대라고 볼 수 있다. 1200년대에 창설된 마드리드 아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이고 스페인 국왕을 비롯해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가 배출된 명문이었다. 노벨상 수상자만 7명을 배출한 곳이라니 지금 내가 지내는 레지던스 못지않은 ‘레전드’에 해당하는 대학이었다.


마드리드 국립대학 꼼쁠루뗀쎄 입구의 웅장한 표지석



대학교 내에 4차선 차도가 놓여있고 버스가 드나드는 것도 서울대를 연상케 했다. 교수님은 인문학부까지 차를 몰아가며 학교에 대한 소개와 스페인에서의 생활과 특강에 대한 준비 사항 등을 말씀해주셨다. 스페인에서만 삼십 년을 사셨다는 정교수님은 한국말의 스피드도 현지인과 같아지셔서 빠르고 활기찼기에 짧은 시간 안에 나는 매우 많은 정보를 섭렵할 수 있었다. 교수님과 함께 인문대학 건물에 들어가 돌아서자 정문 입구를 장식한 거대하고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목격할 수 있었다. 성당에서 볼 수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와는 톤과 배열이 상당히 다른 상당히 유니크한 작품이었다. 감탄을 하는 내게 교수님이 강의장이 될 곳을 보여주셨다. 오 마이 갓. 그곳은 역대 총장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매우 고풍스런 대형 탁자가 놓인 대회의실이었다. 이곳에서 강의를 제가 한다고요? 그럼요. 잘 준비해주시기 바라요. 예, 그러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영광입니다.


이토록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강의실이라니.



교수님과 특강 준비에 대한 내용을 간단히 합의한 후 나는 캠퍼스를 가로질러 ‘대학 도시’ 지하철역에 다다랐다. 아예 캠퍼스 안에 자리한 지하철역이었다. 돌아가는 길, 늦가을 캠퍼스의 정취를 다시 떠올리며 아름답고 전통이 덕지덕지 묻은 인문학부 건물을 기억하며 특강 내용을 머릿속에서 정리해나갔다. 즐거웠다. 사실 지난주에 토지문화재단 페이스북을 통해 나와 같이 교환 작가로 선정되어 토지문학관에 가 있는 스페인 작가 알베르토의 특강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교환 작가가 된 그에게 반가운 마음과 약간의 동지애를 느끼고 있었는데, 그가 원주의 삼육고등학교에서 한국 고등학생을 상대로 특강을 했다는 소식에 부러움이 차올랐었다. 한편으로 나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분발하게 만들었는데 마침 이런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알베르토가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스페인 작가의 삶을 들려주었듯이 나 역시 스페인 대학생들에게 한국 작가의 삶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딱히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삶이란 결국 표현하는 것이고 인내하는 것이고 가난과 행복으로 기운 옷을 입고 글을 쓰는 것에 다름 아님을 상대방 나라의 학생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레지던스로 돌아온 나는 선물 받은 책을 조금 읽는 것으로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에 대한 오늘의 과업을 마친 뒤 다음 주 특강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강의 원고에 제목부터 입력했다.


‘A Life and Work as a Storyteller’


인문관 입구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마드리드 꼼쁠루뗀쎄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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