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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Mar 29.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29

당일치기 여행


오! 톨레도



지금 나는 톨레도 외곽을 한 바퀴 도는 '소코트랜'이라 명명된 관광용 꼬마기차에서 입을 벌린 채 소리 없는 탄성을 내뱉고 있는 중이다. 이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중세 성곽도시와 그 도시를 감싼 타호 강의 아름다움은 한국인 오디오 가이더의 기계를 흉내 낸 말투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질 지경이다.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로서 정치 및 상공업 중심지로 융성했던 도시. 가톨릭, 이슬람, 유대교의 유산이 공존하는 도시.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고도(古都). 톨레도는 한마디로 스페인 중세 시대의 엑기스를 모아 담은 거대한 항아리와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돈키호테를 쫓는 여정과 마드리드 생활 마무리를 뒤로 하고 여긴 왜죠? 간단하다. 날씨가 좋아서.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버스로 한 시간 십 분 정도 거리다. 알칼라 데 에나레스가 서울에서 양평이라면 여긴 서울에서 수원 정도 거리다. 버스로 당일치기로 갈 수 있는 곳이고 무엇보다 다음 주에는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일을 정리해야 하기에 이번 주 안에 꼭 톨레도를 가야 했다. 그런데 최근 계속 비가 왔다. 비가 오거나 오는 척하거나 올 태세가 한 주 내내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모처럼 맑은 금요일 아침 하늘을 보자마자 나는 톨레도 행 버스가 출발하는 마드리드 남쪽 버스터미널을 향해 뒤도 안 돌아보고 나섰다.


소코트랜이 잠시 정차한 성곽에서 보이는 톨레도 전경.



물론, 당연히, 톨레도 방문 역시 돈키호테 추적기의 연장선상이다. 톨레도 역시 세르반테스가 머물렀던 도시고 돈키호테의 기원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도시이기도 하다. 돈키호테 1권을 보면 141페이지에서 142페이지에 걸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날 톨레도의 알카나 시장에 나갔더니 한 소년이 비단 장수에게 잡기장이며 낡은 서류 뭉치를 팔기 위해 나와 있었다. 나라는 사람은 길바닥에 찢어진 종이라도 읽는 천성을 지닌 인간인지라 그 소년이 팔겠다고 하는 잡기장 한 권을 집어 들어 보았는데 거기에는 아랍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랍 글자인 것은 알겠는데 읽을 수는 없어서 근처에 에스파냐어를 아는 무어인이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이 잡기장에 돈키호테 이야기가 적혀 있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빨리 첫 부분을 읽어보라고 독촉했다. 그는 시키는 대로 즉석에서 아랍 말을 에스파냐 말로 번역해 읽어 주었다. <아라비아의 역사가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쓴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이야기.> 이 책의 제목이 내 귀에 와 닿았을 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감추느라고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이것이 <돈키호테> 속 세르반테스가 아랍 작가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쓴 돈키호테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액자소설 구조를 이루는 액자의 틀 같은 부분이고, ‘길바닥에 찢어진 종이라도 읽는 천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세르반테스 자신에 대한 소개가 나오는 지점이며 동시에 세르반테스의 능청미가 한없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장면으로 세르반테스가 설계한 공간이 바로 톨레도다. 돈키호테 추적기를 쓰는 작가로서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발견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톨레도와 톨레도의 알카나 시장을 방문하지 않을 수는 도저히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이 내가 한국인과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로 가득한 꼬마열차에서 그들과 일행으로 보이지만 일행이 아닌 이유다. 단순 관광객이 아닌 톨레도에서도 돈키호테를 추적하는 임무를 포기하지 않는 미션 수행자의 태도를 나는 결코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비록 입은 계속 벌어지고 연신 카메라로 요새 도시의 풍경을 찍느라 정신이 없지만 이 역시 세르반테스의 환영과 돈키호테의 흔적 하나라도 포착하려는 필사적인 행위임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소코트랜을 타고 도시 외곽을 돌며 감상하는 톨레도의 위용.

 


사실 톨레도에 오기 전 하루를 또 허비한 일이 있었다. 이것은 톨레도 방문을 위해서뿐 아니라 이즈음 생존의 필수품을 구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9월 1일 마드리드로 오는 나의 트렁크에서 가장 두꺼운 옷은 얇은 마이 한 벌이었다. ‘추우면 현지에서 사 입자!’가 모토였기에 트렁크를 비워 온 것이다. 아시다시피 스페인은 자라를 비롯해 망고, 데시구엘 등의 스파 브랜드가 넘치는 곳이고 프라이마크, H&M, 베네통, 루이뷔통(같은 ‘통’이라 언급했지만 사실상 갈 일이 없는 곳)같은 유럽연합의 옷가게들도 한국보다 가벼운 지갑으로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나는 날이 쌀쌀해지는 대로 점퍼, 재킷, 슈트, 코트 등 뭐라도 좋으니 현지에서 사 입고 한국에 돌아가 겨울까지 날 수 있는 아우터 하나를 구입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10월 중순까지도 반바지에 반팔티를 입고 낮에 돌아다닐 수 있던 마드리드의 날씨는 겨울까지 날 수 있는 아우터를 사기엔 애매했고, 나는 일교차로 인해 추워지는 저녁이면 얇은 마이를 입고 맥주를 사 와야 하는 애매한 날씨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11월이 되고도 추위가 좀처럼 실감 나지 않아 이대로 옷을 사 입지 못하고 가는 게 아닌가 하던 찰나, 비가 오기 시작했다. 컴온. 노벰버 레인.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날씨가 찾아온 마드리드는, 비로소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내에 나갈 때마다 옷가게를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 프라이마크, 싼 이유가 있다. 자라, 한국에선 폼나는 기분으로 사 입던 브랜드였는데 현지에 오니 왠지 싸 보이는 게 아닌가?(가격도 싸고 품질도 음). 망고와 데시구엘도 역시 같은 이유로 아쉬웠다. 그나마 기대한 H&M은 한층 나았지만 스웨덴 브랜드여서인가? 한국 아재 체형의 내게는 온통 길기만 했다.


그래서 겨울 아우터 구매 미션은 점점 난항에 빠져들었고 추위는 한층 다가왔으며 그 좋아하는 노벰버 레인이 야속할 지경이 될 찰나 남은 ‘통’으로 끝나는 두 군데 중 유일한 희망(루이비통은 열외입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젠장.)인 베네통으로 향했다. 그리고 베네통에서 다행히 마음에 드는 코트를 한 벌 발견할 수 있었다. 살짝 부담이 되는 가격이었지만 면세를 받으면 어느 정도 만회가 되었기에 옷의 태그를 떼지 않고 아주 추운 날만 아껴 입다가 한국에 입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해발 500 고지가 넘는 요새이자 꽤 쌀쌀하고 바람이 맴도는 성곽인 톨레도를 새로 산 코트를 휘적이며 찾아온 것이다. 좋았다. 아주 따뜻하고 폼이 났다. 꼬마열차로 도시 전체의 외곽과 전망을 섭렵한 뒤 나는 중세 거리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톨레도 구도심을 걷기 시작했다. 잡기장을 파는 소년이라도 발견하면 내용을 살피고 돈키호테의 어떤 흔적이라도 있으면 코트를 팔아서라도 그것을 사 오기라도 할 듯, 세르반테스가 이 도시에서 살면서 꿈꿨던 이야기와 이야기의 분위기를 찾아서 거리를 오갔다. 그런데 톨레도는 길을 잘 찾는 나 같은 사람도 미로에 빠져들게 만드는 길고 꼬불꼬불한 내장 같은 거리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내장 속에 숨은 주요 장기처럼 카톨릭, 유대교, 이슬람교의 주요 스팟이 자리해 있었고 그들이 공존하며 벌어지는 비밀스럽고 애틋한 이야기가 넘치는 공간이었다. 이 과거가 공존하고 역사가 그윽한 고도에 비하자면 마드리드는 급조된 신도시에 불과했다.


아름답고 오묘한 골목과 골목으로 이루어진 톨레도의 속내.



아침 일찍 톨레도에 도착해 연신 쏘다닌지라 정오가 지나자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식당이란 식당은 모두 관광지의 풍모를 갖춘 채 돈을 쓰고자 안달하는 외지인들을 받기 바빴고 딱히 들어가고 싶은 곳을 발견할 수도 없었다. 배고픔을 참으며 나는 돈키호테를 찾는 수행을 계속했다. 이곳은 관광도시라 마드리드보다 돈키호테를 주인공으로 한 인형과 그림, 세공품들이 넘쳐났지만 인사동에서 부채와 장구 열쇠고리를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심히 주저되었다. 나는 구도심을 벗어나 메인 광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망이 트인 곳을 향해 걷던 와중에 계단 아래 자리한 어떤 동상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의 뒤태였다. 세르반테스 동상에게 다가간 나는 그를 향해 톨레도에서의 재회를 반가워하며 물었다. 작가님 여기 현지 맛집 어디 없나요?


만들어진 지 오래되지 않아 그동안 본 것 중 가장 세련된 풍모의 세르반테스 동상은, 말이 없었다. 나는 돈키호테를 찾아서 어디를 가든 그곳에 나타나 나를 맞아주고 격려하는 그의 동상과 함께 사진을 찍은 뒤, 배고픔을 억누르며 마드리드행 버스에 올랐다.


위풍당당한 톨레도의 세르반테스와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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