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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Mar 31.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30

떠나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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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에서의 일주일. 이제 정확히 일곱 개의 요일만이 남았다. 생각해보니 마드리드가 그동안 살면서 가장 오래 체류한 외국 도시에 당당히 등극되었다. 이제 남은 일주일은 휴가를 보내듯 쉴 것인가? 그동안 가보지 못한 남은 마드리드의 숨은 명소를 찾아갈까? 아니면 세고비아나 쿠엥카 같은 근교 도시를 다녀올까? 혹은 이 도시에서 가장 좋았던 나만의 스팟을 다시 방문하며 가을 추수하듯 추억을 담을까?


마드리드 최애 공간, 비 오는 날의 '빠즈 시장'



모두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계획이다. 말라사냐 거리도 마음껏 걷고 싶고 마요르 광장 골목에 깔라마리 맛집도 다녀와야 한다. 살라망카 거리의 빠즈 시장에도 다시 가고 싶고 레티로 공원에서 낙엽 짙은 늦가을도 만끽하고 싶다. 하지만 언제나 막바지에 발동이 걸린다고... 그간 골머리를 앓으며 구상한 이야기가 이제 손가락 끝에서 레이저가 나가듯 발휘되려 하고 있다. 그깟 일주일간 얼마나 더 쓰겠는가? 하면서도, 얼마를 더 쓸진 몰라도, 모름지기 작가의 손가락이 간지러울 땐 발가락은 가지런히 책상 아래 놓여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그저 동네를 산책할 따름이다. 오늘은 소로야 미술관으로 향한다. 얼마 전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서 나는 호아킨 소로야의 작품에 홀딱 반하고 만다. 그리고 그의 미술관이 레지던스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야 말았다. 그 주 일요일(일요일이 입장 무료)에 한번 방문한 뒤 나는 이 미술관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또 빠져들고 말았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소로야 뮤지엄.



발렌시아 출신의 인상파 화가 호아킨 소로야(Joaquin Sorolla, 1863~1923)의 작품과 그의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미술관 건물은 그가 생전에 거주했던 우아한 저택을 재단장해 완성됐다. 미술관으로 들어서면 소로야가 직접 설계했다는 안달루시아 풍의 정원이 단아하게 나를 맞아준다. 작은 분수와 싱그러운 식물들과 그 사이 벤치들이 잠시 쉬어가라 한다. 계단을 올라 저택으로 들어가면 그의 그림이 벽지인양 채워진 방들이 나를 맞이한다. 소로야의 그림에 둘러싸여 한동안 방을 빙글빙글 돌며 감상을 한다. 발렌시아 해변의 파도가 철썩이고 그 해변을 오가는 여자들과 물장구치는 아이들, 동물들이 그의 캔버스에서 살아 역동하고 있다.


아름다운 안달루시아 풍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복도와 그의 그림으로 충만한 거실.



소로야의 작업실로 쓰였던 가장 큰 방에 들어서면 죽기 바로 전까지 작업하던 캔버스가 미완성된 작품 옆에 붓들과 함께 놓여 있다. 화가의 작업실은 소설가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화구와 캔버스, 의자와 캔버스 받침대. 펜과 종이, 의자와 책상과 똑같을 따름이다. 그의 잘생긴 옆모습이 돋보이는 조각상을 보며 작가의 자존심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돌아서면 소로야의 아름다운 부인이 바다를 배경으로 선 채 남편을 향해 지긋이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소로야의 수많은 작품의 모델이자 이 저택의 기증자이기도 한 클로틸데 가르시아 델 카스티요(Clotilde García del Castillo)는 남편의 붓 끝에서 살아나 이곳을 찾은 후세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해 한동안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호아킨 소로야 미술관. 그의 작업대.



소로야의 세계에 머물다 빠져나온 나는 걸어서 까르푸로 향한다.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이 가게를 참새방앗간처럼 드나들며 맥주와 까바, 와인, 하몽과 감자칩을 공수했다. 오늘도 빠질 수 없다. 밤 풍경을 보며 마시기 좋은 2.3 유로 싸구려 까바는 한국에선 절대 만날 수 없다. 한편 얼마 전 마드리드 사람들을 한마디로 정리하는 글귀를 관광 티셔츠에서 발견했는데 큼직한 하몽과 함께 적힌 글귀는 이것이었다. ‘Jamon Eater’ 그래. 하몽을 먹자. 역시 한국에선 비싸디 비싼 이베리코 하몽을 값싸게 구매한다. 농산물이 싸고 좋은 스페인에서도 올리브와 감자는 으뜸이다. 그 올리브로 튀겨 만든 감자칩 역시 하나라도 더 먹어야 한다. 반면 마드리드의 마오우 맥주는 한국 맥주와 많이 비슷해 차별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그 고동색의 포탄 같은 1리터 유리병은 어린 시절 마시던 유리병 우유를 떠올리게 한다. 갈색 칙칙한 페트병에 담겨 금방이라도 김이 샐 것 같은 한국 맥주와는 그래서 다르다. 그러하니 또 계속 마셔줘야 한다.


까르푸에서 그렇게 장을 보고 마라뇽 광장에 다다른다. 마라뇽 광장에 서면 절로 마음이 편해진다. 레지던스에서 가장 가까운 광장이고 동명의 지하철역이 초기 마드리드 생활의 허브였기 때문이다. 이름 역시 마라뇽, 마라뇽 발음하다 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레고리오 마라뇽. 휴머니스타



지하철역 벽에서 그레고리오 마라뇽, 그의 사진과 소개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엔 ‘휴머니스타’라고 적혀있었다. 휴머니스트라고 불린 그는 과연 어떤 위인일까 구글 검색을 해보니 1900년대 초 스페인의 의사이자 과학자, 역사가이자 작가 및 철학자라고 나왔다. 이론의 여지가 없이 그는 르네상스형 휴머니스트였고 나는 마라뇽 광장을 지날 때마다 칭송하는 의미로 그의 이름을 되뇌게 된다. 그레고리오 마라뇽, 그레고리오 마라뇽, 그럼 다시 기분도 좋아지고 그럼 나조차 휴머니스트가 된 듯하다.


석양이 질 무렵 마라뇽 광장.

 


마라뇽 광장을 지나 5분 정도 걸어 레지던스로 돌아온다. 326호, 내 방. 내 작업실. 내 거처. 이 작고 아담한 공간에서 지난 석 달간 무작정 돈키호테를 쫓으며 이야기를 짜냈다. 세르반테스가 세비야의 감옥에서 시대착오적인 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이달고를 떠올렸듯이 나 역시 이곳을 글감옥 삼아 21세기 자본주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정신 상태로 서울 거리를 방랑하는 그를 떠올렸다. 돈키호테를. 슬픈 몰골의 기사를. 라만차의 기발한 이달고를.


방에 누운 채 오늘 쓸 분량을 구상하다 점심을 먹으러 간다. 내 친구 호세가 반긴다. 미리 사진으로 찍어놓은 오늘의 메뉴를 살피며 더듬더듬 스페인어로 주문한다. 프리메로는 베렌헤나스 레예나스 데 아툰(참치를 넣어 구운 가지요리), 세군도는 바칼라우 콘 콘피투라 데 토마테 이 아쎄이투나스 네그라스(염장 대구에 토마토와 블랙올리브 곁들임). 포스트레는 타르타 데 알멘드라스(아몬드 타르트). 이제 주문은 쉽다. 음료는 뭐 할 거냐는 질문에는 우나 코파 데 비노 비앙코(화이트 와인 한 잔). 주문을 받은 호세가 엄지를 올리며 사라지고 나는 홀로 식탁에 앉아 빵을 뜯으며 다시 오늘 써야 할 이야기에 대해 생각한다. 딱딱하고 둥근 이 식당의 빵을 뜯을 때마다 산초 판사가 쟁여놓은 돈키호테와 그의 식사가 떠오른다. 소설 속에서 산초 판사는 그 빵으로 적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에 비하면 레지던스의 빵은 부드럽고 촉촉하기 그지없다.


레지던스 레스토랑의 시그니처 '주먹빵'

 


점심 정찬을 먹는다. 혼자 맛있게 이곳의 물산으로 건강하게 차려진 식탁을 섭렵한다. 한국에서라면 꽤 값나갈 요리를 감사의 마음으로 남기지 않고 꼭꼭 먹는다. 10월 중엔 식사에 소홀했다. 하지만 11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끼니를 거르지 않고 살찔 것 염려 없이 먹는다. 스페인을 느끼는 가장 좋은 방법인 그들의 수려한 음식문화, 그것을 맛보는 데 충실할 따름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 열심히 일하는 친구 호세에게 눈인사를 하고 식당을 나선다.


Residencia de Estudiantes의 '슈퍼 매니저' 호세 루이스와.



레지던스 앞마당으로 나오니 바람이 차다. 옷깃을 여미며 레지던스 마당을 서성인다. 아름다운 정원과 100년이 넘은 갈색 벽돌 건물을 돌며 저 너머 정부 건물 국기봉에서 펄럭이는 노랗고 붉은 스페인 국기를 바라본다. 저 노랑만큼 밝고 쾌활한 스페인 사람들이고 저 붉음만큼 뜨겁고 거친 이베리아 땅덩어리다. 이곳에 서서 그들과 나눈 석 달이란 시간이 나를 다시 도전하는 작가로 만들어준다고 느낀다. 붉은 정열을 지니고 노란 웃음을 잃지 않으며 내가 싸울 투우 경기장을 향해 돌진하라 말한다. 나는 몸을 돌려 작업실이 있는 건물로 향한다.


투우 경기장에 선 마타도르처럼 작업실에 들어온 나는 책상에 앉아 눈앞에 어른거리는 커다란 황소 한 마리와 마주한다. 돈키호테의 뿔과 산초 판사의 덩치에 둘시네아의 화려함과 로시난테의 콧김이 불끈대는, 세르반테스의 환영이 눈동자에서 터져 나오는 큰 황소 한 마리와 맞선다. 나는 쓴다. 나만의 돈키호테 이야기를 ‘지금’ 쓰고 있다. 이 아름다운 도시를 떠나는 날까지 그럴 것이다.


아디오스.


Residencia de Estudiantes. 326호실에서.



추신. 스페인이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로 심히 어려운 이즈음, 그곳의 사람들에게 이 매거진 글을 바칩니다. 돈키호테의 후예들이 이 위기를 딛고 삶을 회복하기를, 그들만의 밝고 활기찬 일상을 다시 영위할 수 있기를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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