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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Mar 27.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28

특강 下


A Life and Work as a Storyteller



“부에나스 디아스. 미 놈브레 에스 김호연.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온 스토리텔러 김호연입니다. 저는 지난 9월에 교환 작가로 스페인의 유서 깊은 레지던스 ‘레시덴시아 데 에스튜디안테스’에 입주 해 두 달 반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게도 매우 소중한 날입니다. 마드리드에 온 지 석 달이 다 되어가고 다음 주면 이곳을 떠나게 되는데 그전에 꼭 마드리드 대학생 여러분들을 한번 만나고 싶었거든요.


한국에서도 여러 곳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도서관, 고등학교, 대학교, 기업, 그리고 동네 문화센터에서도 했습니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처음이네요. 오늘 이 특강이 제가 해외에서 하는 첫 특강이고, 그곳이 바로 전통의 마드리드 국립대학교 꼼쁠루뗀쎄 인문학부 학생 여러분 앞이란 것이 더욱 영광입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오늘 한 명의 스토리텔러로서 여러분께 제가 작가로 살아온, 아니 작가로 한국에서 살아온 과정을 허심탄회하고 담담하게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만화 편집자이자 출판인으로 살아온 제 경력을 통해 한국문학과 한국 문화 콘텐츠에 대해 배우고 나누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강의실 입구에 붙은 특강 공지



11월 20일 수요일. 마드리드 꼼쁠루뗀세 국립대학교 인문학부 특강. 삼십여 명의 스페인 대학생들이 제각각의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남자 수강생은 단 한 명, 이곳에도 해외 문화에 대한 관심은 여학생들이 월등히 높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강의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은 채 그들의 시선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의 원고에 따라 중간중간 쉼을 두면 옆 자리에 앉으신 정미강 교수님이 그때마다 유창한 스페인어로 내용을 통역해 주셨다. 학생들 또한 한국어를 공부하는지라 내가 하는 말을 조금이라도 알아들으려 애썼고 다시 정교수님의 통역 내용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보였다.


낯선 이국의 작가가 들려주는 새로운 이야기를 통역을 거쳐 들어야 하니 처음엔 강의 분위기 자체가 산만했다. 그러다가 내가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한 영화와 그 영화의 배우들을 보자 한층 관심을 보였고 최근에 이곳에도 개봉한 <기생충> 이야기를 비롯한 한국 영화 이야기가 오가며 강의는 활기를 띄었다. 이후 연극 <망원동 브라더스>의 프로모션 영상을 보여주자 학생들은 작품에 대해서 큰 호기심을 보였다. 정교수님의 통역을 통해 네 명의 남자가 한 여름에 8평 옥탑방에 모여 산다는 설정을 듣고는 다들 기겁을 했고 나는 부모님이 출판 관계자인 학생이 있으면 <망원동 브라더스>를 스페인에 수입할 것을 추천해달라고 덧붙였다(만 그런 학생은 없는 듯 다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해외에 판권을 파는 건 어려운 일이다).


올해 초 출간한 신작 소설 <파우스터>의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한 뒤 4분간에 걸친 북 트레일러를 틀어주자 학생들의 관심은 최고조에 올랐다. 일단 북 트레일러라는 형식을 흥미로워했고, 웹툰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영화 예고편처럼 나오자 내내 집중력 있는 모습으로 내용을 빨아들였다. 북 트레일러가 끝나고 나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파우스터>를 썼듯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한 다음 소설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덧붙여 학생들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돈키호테에 대해 물었다. 이에 통역을 하던 정교수님이 학생들 중 하나를 콕 집어 물었다. 맨 앞에서 짧은 한국말로 종종 추임새를 넣던 우등생 여학생이었는데, 순간 그녀가 무어라 말하자 정교수님이 ‘마드레!’라고 짧은 탄성을 내뱉었고 강의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 역시 눈치로 대충 짐작이 되었다. ‘마드레!’라면 ‘아이고 어머니’ 아니겠는가.


교수님의 통역을 통해 들은 내용인 즉 “요즘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은 돈키호테 같은 옛날 소설은 안 읽어요. 인문학부에 돈키호테에 미친 나이 든 교수님 한분이 계시니까 그분에게 물어보세요.”였다. 실로 ‘마드레!’가 아닐 수 없었다. 잠시 뒤 다른 학생 하나가 손을 들고 역으로 질문했다. “돈키호테는 패러디 문학인데 그렇다면 당신은 패러디 문학을 다시 패러디하겠다는 건가요?” 내공이 있는 질문이었다. 마치 참고 있다가 긴장이 풀리자 한숨 돌리고 진심을 털어놓는 질문이었다. 나는 답했다. “세르반테스 자신이 <돈키호테>에게 한 일을 나도 하고자 합니다. 그가 <돈키호테>를 통해 스스로와 시대를 풍자했듯이 나는 이 시대의 한국, 서울에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풀어놓고 그들이 여러분의 고전소설에서 했던 일을 재현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메타픽션은 내가 늘 관심을 가져온 주제이기에 그 일을 세계에서 제일 먼저 성공적으로 해 낸 거장 세르반테스와 그의 작품을 쫓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그렇게 내가 준비한 특강 내용을 나눈 뒤 질문을 받았다. 처음엔 쭈뼛대던 학생들이 차차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참관을 와 준 스페인 한국문화원의 실무관님도 질문을 했다. 정교수님도 질문을 했다. 나는 적잖이 감동을 머금은 채 성실히 답변했다. 이곳에 와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보낸 두 달 스무날 동안은 듣지 못했던 내용과 답하지 못한 답변을, 그들의 질문을 통해 듣고 배우게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랬다. 정말 그랬다.


특히 마지막에 맨 뒷줄에서 수줍게 “지금 이곳에 작가를 꿈꾸는 학생이 있다면 그에게 무슨 조언을 해주실 수 있나요?”라고 질문한 학생이 자꾸 떠오른다. 사람들이 흔히 인터넷 게시판에서 ‘친구 이야기’라며 ‘자기 사연’을 남기듯 그녀는 모두에게 들통날 알리바이를 감수하면서도 진지한 눈빛으로 답을 구하고 있었다. 통역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영어로 답이 튀어나왔다. ‘Keep Going.’ 이후 좀 더 길고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학생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두 단어뿐이다. 그리고 작가이든 아니든 모두가 기억해야 할 두 단어다. 그 두 단어만이 자신의 인생을 걸어가게 만드는 오른발 왼발일 따름이다.


김호연 특강. 마드리드 국립대학 꼼쁠루뗀쎄 인문학부. 2019.11.20



A Life and Work as a Storyteller. 이야기꾼으로서의 일과 삶. 특강의 핵심은 그 둘이 딱히 다르지 않다는 거였다. 최고의 권투 선수는 링에 오르지 않을 때도 늘 링 안의 인생을 살게 된다. 그는 경기를 준비하며 연습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잠에 들기 전에도 링 안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링에 올라 12라운드를 치른 뒤 판정 결과를 듣고 링을 내려와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링을 떠올릴 것이다. 일이 링이라면 삶은 더 큰 링일 뿐이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생각은 늘 작품 속에서 맴돌고 그렇게 다져진 작품들이 모여 인생이란 모자이크가 완성된다. 고로 도망치지 않고 작품이란 링 안에서 삶을 수행하는 것만이 작가가 살 길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한국의 서울에서나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나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나 작가의 삶은 결국 똑같기 때문이다.


특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다. 어느덧 7시. 한국이면 저녁을 먹을 시간이지만 이곳의 저녁은 9시다. 하지만 이제 익숙하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토지문화재단에 메일을 작성한다. 강의 사진을 첨부하고 오늘 특강의 감상을 적고 이런 기회를 준 토지문화재단에 감사함을 더해 전송을 누른다. Ainhoa Sanchez와 정미강 교수님께도 메일을 보낸다. 역시 강의 사진과 함께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것에 감사하며 오늘의 특강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본다.


몇 해 전 카이스트의 예술가 레지던스 프로그램 ‘엔드리스 로드’에서 지내며 7주 간 스토리텔링 워크숍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워크숍 마지막 시간에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카이스트에 와서 작업실을 얻고 창작지원을 받는 것은 전부가 아니다. 워크숍을 통해 당신들을 만나고 당신들과 이야기를 나눈 것이야말로 이곳에 온 큰 의미라고. 결국 사람을 만나 통하는 것이 중요하지 혼자 글 쓸 공간만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오늘 마드리드 국립대학교 특강에서 역시 똑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방인으로 이 도시에서 두 달 넘게 보내며 내가 하려 한 것은 혼자만의 공간을 제공받고 혼자 많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었고, 이곳의 사람들에게 무어라도 듣고 어떻게든 체험해 쓰는 것이었다. 체류 막바지에 기회가 되어 1회성 특강을 한 것이 아쉬웠지만 그것만으로도 좌충우돌하던 이방인은 많은 것을 실감했다. 나는 메일함을 내리고 문서 창을 열어 오늘의 기억을 기록한다. 소중하다.


9시가 되었다. 식당에 가니 매니저 호세가 반갑게 맞아준다. 그는 내가 레지던스 식사를 몇 번 거르다 가면 그간 어떻게 된 거냐며 걱정해주기 급급하다. 나이를 알 수 없는 노련한 인상의 그는 늘 유쾌하고 활기차다. 마드리드에 오며 스페인 친구 하나 사귀고 싶었다. 작가들은 이메일로는 소통했지만 결국 만나지는 못했다. 우연히 인사를 나눈 코스타리카 시나리오 작가는 친해지고 싶었으나 수줍은 꼴이 나와 닮아서 더 이상 교분을 나누지 못했다. 종종 들르던 식당의 점원들과 한국문화원의 아르바이트 총각과도 반가운 인사를 나누곤 했으나 친구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이후 혼자 여행을 하고 침잠을 하고 작업에 빠져들고 하며 딱히 소통하지 못했다. 그런데 레지던스 식당에 올 때마다 반겨주는 호세, 알바로, 아이카르도, 마리아, 그리고 여러 직원들...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자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좀 더 소중해진다. 나는 핸드폰에 찍어 공부해 놓은 오늘의 메뉴를 더듬더듬 발음한다. 호세는 내 서툰 스페인어 주문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한다. 무이 비엔.


메뉴판으로 공부하는 오늘의 스페인어 수업.



음식이 나왔다. 늘 그렇듯 레지던스 식당의 저녁은 훌륭하다. 호세가 어떠냐는 듯 눈으로 묻는다. 나는 친구에게 답한다. 무이 비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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