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에 수천 개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가물가물한 사람들. 직장 생활, 사회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이겠지. 하지만 내가 회사를 그만두며 자연스럽게 인연이 끝난 사람들이다. 하루는 마음을 먹고, 그 번호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모아둔 온갖 잡동사니들이 있다. 책도 있고, 음악 CD도 있다. 결혼 후 이사를 거듭하다 보니 집 공간이 부족해졌고, 결국 버리기로 했다. 추억이 깃든 물건들이라 아쉬웠지만, 버리고 나니 비로소 그 공간을 나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로 채울 수 있었다.
부처는 그런 말을 했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요즘 들어 그 말이 마음에 참 와닿는다. 부처는 집착과 욕심을 비워내면 행복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는 연습을 한다. 관계든, 물건이든, 생각이든, 내 삶에서 진짜 소중한 것만 나에게 남기려고 한다. 시절 인연이 끝난 것들로 내 시간과 공간을 채우지 않는다.
세상은 자꾸 나에게 더 채우라고 말한다. 하지만 비워냄이 있어야 채울 수 있다. 시절이 지난 것을 비워내야 시절에 맞는 것으로 채워낼 수 있다. 그렇게 매일 나를 비우고, 다시 나를 채워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