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생각이 납니다.
회사에서 회식을 가졌는데, 회식 자리에 팀장님 급 분들이 대거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회식 자리는 결국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모임이었죠. 저야, 회사에 큰 미련이 없어서 잘 보이겠다는 마음이 없으니, 그냥 재미없는 회식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자리였겠지요.
본부장님이 K 팀장에게 한 마디 하셨습니다.
"K 팀장, 머리숱이 많이 줄었네. 요즘에 많이 힘든가 봐."
"본부장님, 제가 요즘에 일을 열심히 하나 봅니다. 머리숱이 많이 빠지네요, 하하하."
"허허, K 팀장, 나도 그랬어. 그래서 XX 병원에도 가고, XX 약도 쓰는데 좋아. 옆 부서에 L 팀장도 고생 많이 했지. 우린 일이 많으니깐 그런 일도 있는 거지 뭐. 근데 J 팀장은 머리숱이 많네?"
깜짝 놀란 J 팀장.
"본부장님, 저는 요즘에 피부가 나빠졌습니다. 얼굴 보세요. 머리는 유전이라 괜찮은데, 피부에 검버섯이 엄청 생겼습니다.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에요."
"그렇네, 자네도 고생이 많네."
옆에 있는 L 부장.
"본부장님, 저는 허리 디스크가 다시 도졌습니다. 아, 이거 병원 갈 시간도 없고 힘드네요."
"그래, 나도 디스크를 달고 살지, 허허"
이 대화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힘든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노는 것처럼 보일 것 같나 봅니다.
저는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좀 행복하면서 회사 다니면 안 되냐고 생각하면서. 아픈 대열에 끼여들지 않는 저를 본부장님은 이상하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부장님이 피날레를 날리셨습니다.
"그래, 회사 생활이 즐거우면 돈을 내면서 다녀야지. 우리가 월급을 받는 것은 일이 힘드니깐 그런 거야. 나 때는 결혼식 전날에도 야근을 하고 신혼여행도 반납하고 자료도 만들고, 다 했어"
제가 제일 싫어하는 류의 말입니다. 회사에서는 일 때문에 힘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구성원들이 힘든 것을, 다른 구성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겠죠. 힘들수록 더 일을 잘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습니다. 힘들수록 월급도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죠. 그 논리에 기대에 타인을 더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누가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할 것인가가 아닌, 누가 더 고생을 하고 있느냐가 평가의 기준이 되는 일이 많습니다. 모두 다 자신이 회사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회사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회사 풍경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풍경은 10년 전 풍경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회사 생활에 힘든 척 하는 것이 유리하고 좋은 것을 있는 그대로 내어 보이면 불리한 생리는 변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힘든 척 하는 것이 유리한 직장 생활, 참 고달픈 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