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없는 몽상가에게 주어진 세상의 첫번째 경고
홍보팀에서 5년째 일하는 어른의 이야기입니다. 첫 에피소드는 아래 글을 봐주세요.
https://brunch.co.kr/@alexkidd/242
당시 난 3학년이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취업에 대한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던.
전역 후 맞이한 4번째 학기에는 편입 시험을 준비하느라 최소 학점을 들으며 집과 도서관을 전전했고, 시험이 끝나고 결과를 겸허히(모조리 탈락했다) 받아들이고 정신차려보니 “취업을 준비해야하는 3학년”이 되었다. 남들은 1학년때부터 준비하는 그 취업 말이다.
마케팅과 광고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3학년 1학기부터 본격적으로 홍보 마케팅 과목을 중심으로 수강을(교내 발표 도장깨기를) 시작했다. 잘 만든 장표는 따라했고, 잘 하는 발표 또한 바로 카피했다. 실력이 쑥쑥 느는걸 보니 교수님과 면담할만큼 관계도 형성할 수 있었다.
면담 중에 교수님께서 물어보셨다. "L군은 졸업하고 어디로 취업할 생각이야?"
제일기획?
네. 삼성 들어가고 싶고, 이왕 가는거 하고 싶은 일을 좀 업으로 삼아 보고 싶습니다.
교수님은 굉장히 심플하게 대답을 주셨다.
거기 들어가면(갈수 있다면) 네가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 것 같니? 오래 다닐 수 있을까?
생각해보지 못한 다음 단계.
그러네. 창의력 그거 젊을 때만 있는 거 아닌가?
대충 마흔 되면 스탭부서로 가야되나? 좌천되나?
광고대행은 마흔만 되도 버티기 힘들다. 삼성 갈거면 더 오래다닐 수 있는 곳을 찾아봐.
나는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었다. 그말인 즉슨, 직업에 대한 어떤 진중함도 없었다는 뜻.
교수님은 얼마나 어이가 없으셨을까. 대외활동이나 공모전, 발표 컨테스트에 나가서 수상을 한 것도 아닌 내가 제일기획에 가고 싶다는 말이나 하고 있으니.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생각해보면, 준비해 놓은 것도 없으니까 어차피 안 될 거였다는 걸 교수님이 아셨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우회적으로 돌려서 젠틀하게 잘 말씀해 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명하게.
4학년 1학기. 동기들은 확실히 방향을 잡고 있었다.
금융권을 준비하는 친구들은 금융 3종을 준비하고, 대학생 홍보대사가 되어 본인들의 sns피드를 채우기 시작했다.
같이 쇼핑하러 다니던 옷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패션 직군(엠디 라든가)으로 원서를 쓰고 인턴십을 하나둘 경험하기도 했다.
내가 복학하던 시점부터 대기업을 중심으로 대학생 대외 활동이 봇물치기 시작했다. 어디든 몸을 담아야한다는 그런 불안감이 생겨나더라. 다 하니까.
내 선택은? 어차피 회사원이 되는거니까, 어딜 가도 뽑는 직군을 선택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업종이 아닌 직무를 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패션이나 광고쪽보다 훨씬 모수가 큰 제조, 건설 베이스의 대기업을 가자.
2년을 준비하여, 취업을 준비하던 시점에 꿈도 못 꾸던 삼성 모 계열사에 감사하게도 취직하게 되었다. 높은 연봉, 그룹 연수 때도 타 계열사 동기들이 부러워하는 회사, 그 중에서도 문과의 꽃(?) 인사팀 발령.
대부분의 우린 B2C 마케팅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그 마케팅 직군이 전부인줄 아는거다
회사를 다녀보니 그제사 보이는게 많았다
마케팅 팀은 내가 생각하던 카피라이팅이나 브랜딩을 하는 직군이 아니라 영업직이었다
L전자 마케팅팀을 다니던 교회 선배를 보고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가전과 건설 영업은 또 다른 일이다
기획 업무도 결국은 예산과 재무 기반의 업무였다 지금은 이해가가지만 그땐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는 인사팀에서 발표자료도 만들고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 강의를 서칭하기도하고 나름 창의성을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끈기와 루틴 속에서 아주 작은 성의의 차이를 보이는 것, 이게 직장인의 창의성이라는걸 그때 배웠다. 내가 알아오고 누려온 영화, 그림, 문화 같은 소양들을 일에 써먹는게 어렵지 않았고 역량의 하나로 인정 받는 것이.
직장인이 되고, 이태원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던 시기. 이쯤부터는 제일기획 사옥이 그냥 건물로 보이지 않고, 굉장히 멋져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서 나오는 사람들이 대단해보이고, 석양진 건물을 바라보며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지 돌아 보게도 되는 그런.
그럼에도 나는 나름의 삶에 만족하려 애썼다.
그걸 아니까, 더욱 집중하는 수밖에. 어른답게.